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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이혼? 나는 이래서 선택했다”

입력
2015.11.0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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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이혼을 가장 많이 하는 세대가 중장년층이다. 황혼이혼은 100세 시대에 결혼이 처한 필연적 미래일까? 게티이미지뱅크
우리나라에서 이혼을 가장 많이 하는 세대가 중장년층이다. 황혼이혼은 100세 시대에 결혼이 처한 필연적 미래일까? 게티이미지뱅크

이혼 10쌍 중 3쌍은 황혼기에

전국일주 등 미뤘던 자유 만끽

자녀 외 연결고리 거의 없어

‘왜 함께 살지’ 자문하게 돼

결국 곪은 상처가 터지는 것

서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 돼야

“3년 전 이혼했을 때, 내 나이가 예순일곱이었어. 가슴에 멍울이 크게 잡혀 병원에 갔더니 유방암이라데. 절제해야 한다는데, 생뚱맞게 이혼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서더라고. ‘내가 이 수술을 하고 살아남으면 그때는 꼭 이혼을 해야겠다!’ 남편은 남들 보기엔 멀쩡한 회사원이었지만, 집에는 돈 한푼 안 가져다 주는, 저만 아는 인간이었어. 춤추러 다니는 거 좋아하고, 멋 내는 거 좋아하고, 혼자 근사하게 살았지. 내가 미용실 하며 악착같이 벌어 새끼들 키웠어. 애들은 잘 컸어. 큰 딸은 변호사라 내가 늘 자랑스럽지. 절제수술 하는 날, 남편이 온다는 걸 내가 결사 반대해서 못 왔어. 그동안 속 썩으며 고생한 세월이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죽어도 나 혼자 죽어야지, 오기가 생기더라고. 서럽게 눈물이 쏟아지는 걸 입술을 꾹 깨물고 수술실에 들어갔지.

노망 났다고 할 줄 알았는데, 자식들이 많이 이해해줬어. 특히 변호사 하는 큰 딸은 엄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적극적으로 도와줬지. 혼자서 3년을 살았는데, 너무 좋아. 이 좋은 걸 왜 진작 안 했을까 싶을 정도로 그렇게 좋아. 낮에는 구청 문화센터에 나가 장구랑 사교 댄스를 배워. 친구들 만나 차도 마시고, 맛집도 찾아 다니고,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네. 만날 구속 받고 숨 막히게 살다가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니까 얼마나 자유롭고 평온한지 몰라. 애들 아버지는 재결합하자고 난리야. 손주들 보고 싶어 딸네 좀 가 있으면 딸네로 찾아오고, 아들네 가 있으면 아들네로 찾아오고 그래. 하지만 난 결혼생활은 죽어도 다시 하고 싶지가 않아. 애들도 잘 풀렸고, 각자 번 재산도 있고, 보험도 든든하게 있는데, 그 지옥 같은 생활을 왜 또 해? 애들 다 키우고 할 일 다 했으면 이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70세ㆍ서울 거주)

“이렇게 긴 여생, 당신과 보낼 순 없어”

결혼 생활 20년 이상 된 부부들이 갈라서는 황혼이혼 비율이 역대 최다라는 최근 발표는 많은 부부들에게 결혼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법원행정처가 매년 발간하는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해 황혼이혼은 전체 이혼의 28.7%를 차지,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이혼하는 부부 10쌍 중 3쌍이 황혼이혼이라는 얘기다. 2012년 처음으로 결혼 5년차 미만의 ‘신혼이혼’을 추월한 황혼이혼은 매년 신기록을 갱신하며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50ㆍ60대 10명 중 7명이 황혼이혼에 공감한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었으니, 이 추세가 반전되지는 않을 듯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이혼하는 사람들이 장노년층인 이유는 도대체 뭘까.

올해 60세로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는 권모(제철분야 기술직)씨는 아내와 2년 전 이혼했다. 부부불화의 다양한 원인을 총칭하는 ‘성격 차이’가 원인이었다. 잔소리가 많고 의심증이 있었지만, 귀책사유라 할 만한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애들도 웬만하면 그냥 살라고 했죠. 하지만 그대로 계속 살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더라고요.” 권씨는 한때 자영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해 신용불량자가 됐던 시절이 있다. 관계는 그때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헤어지자는 아내에 대한 서운함과 배신감이 내면 깊숙이 자리잡았고, 쏟아지는 잔소리와 의심, 매사 몰아붙이며 비난하고 공격하는 데 지쳐 급기야 아예 입을 닫게 됐다.

“12월에 퇴직하고 평균수명대로 80까지 산다 치면, 앞으로 20년을 더 그 사람이랑 살아야 되는 거예요. 결혼하고 나 하고 싶은 걸 제대로 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어요. 20년을 더 그렇게 살다 생을 끝낸다고 생각하니, 이건 진짜 아니다 싶습디다.” 권씨는 퇴직 후 3년간 전국일주를 할 계획을 세우며 모종의 흥분과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향우회도 나가고, 운동을 좋아해서 등산 모임, 행글라이더 모임, 스키 모임에도 나가요. 외로울 틈이 없죠. 집사람에 대한 원망 같은 건 이제 없어요. 그 사람도 좋은 사람 만나 아직 창창하게 남은 인생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드라마틱하게 연장된 기대수명은 베이비부머 세대를 역사상 가장 긴 결혼생활을 하게 된 첫 번째 인류로 만들었다. 권씨처럼 20세에 결혼해 기대수명까지 산다면 평균 60년, 길면 70~80년간 결혼생활을 하게 된다. 80년간의 행복한 결혼생활. 이건 그 자체로 형용모순 아닐까?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하겠다고 결혼서약을 했는데, 파뿌리가 되고도 20~30년의 계약기간이 이렇다 할 합의절차도 없이 자동 연장되는 것이다. 장성한 자녀가 떠나고 나면 더 이상 ‘함께’라는 단어로 부부를 묶어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게다가 베이비부머는 경제적 기반이 그 어느 세대보다 탄탄하고, 건강 상태 또한 좋다. 결혼생활이 이들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왜 이혼하려는가’가 아니라 ‘왜 함께 살아야 하는가’. 그것이 바로 새로운 질문이다.

황혼이혼, 결혼의 미래일까

황혼이혼 급증은 전 세계적 현상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일본 모두에서 황혼이혼은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미국사회는 2010년 앨 고어 전 부통령의 갑작스런 이혼 발표로 ‘멘붕’에 빠진 적이 있다. 고등학교 연인으로 만나 40년간 성공적으로 네 자녀를 키운 행복한 부부의 전범으로 여겨져 온 탓이다. 참혹한 교통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을 뻔한 고통도 사랑의 힘으로 함께 겪어낸 이 부부는 ‘왜 클린턴이 아니라 고어란 말인가’라는 탄식을 불러일으키며 미국 사회에 황혼이혼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촉발했다. 당시 뉴스위크는 ‘고어 부부가 황혼이혼의 새로운 파도를 이끈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들의 이유 없는 이혼을 “몇 년 안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내릴 수 없는 새로운 선택”이라고 분석했다. 황혼이혼은 40년에 걸친 결혼생활의 실패가 아니라 종료일 뿐이며, 이혼을 했다고 해서 그 결혼이 좋은 것이 아니었다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다는 것. 뉴스위크는 “늘 새로운 시대를 개막했던 베이비부머 세대는 결혼생활에서도 새로운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며 고어 부부의 황혼이혼을 ‘새로운 미래의 징후’로 명명했다.

황혼이혼 급증을 다룬 뉴욕타임스의 지난주 기사에 따르면, 전반적 이혼율 감소의 기조 속에서 50세가 넘은 부부의 이혼은 1990년도에 비해 두 배 증가했으며, 그 중 65세 이상의 이혼이 매우 가파르게 늘어났다. 페퍼 슈워츠 워싱턴대 사회학 교수는 “많은 결혼이 끔찍하지는 않다. 하지만 더 이상 만족스럽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 양육의 과업은 끝마쳤고, 30여년의 생이 남아있다. 이걸 계속해야 하는 걸까, 사람들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자식 때문에 함께 산다(stay together for kids)는 결혼의 기조는 부부관계가 급작스레 적대적으로 돌변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부부에게 아주 늙을 때까지 유효하다. 하지만 은퇴 후 주 7일, 24시간씩 함께 지내게 되는 새로운 생의 사이클은 부부 사이의 갈라진 틈을 크레바스 수준으로 벌려놓기 쉽다. 특히 직장에서의 일과 자기 정체성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남성들이 이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두 사람이 전업은퇴자로서 함께 집안에 머물기 시작하면 두 사람의 관계와 책임, 역할, 업무가 재조정돼야 하건만, 가부장적 문화가 공고한 우리나라에서는 쉽지 않은 얘기다. 가정은 이미 아내(어머니)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형성된 하나의 소우주인데, 새로운 태양이 들이닥쳐 궤도를 뒤흔든다. 이 과정에서 명확히 깨닫게 되는 것은 부부 사이의 정서적 거리. 한 공간에 접점 없이 평행하는 두 개의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남성 노인들의 가정 내 소외로 인한 황혼이혼은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내담자 비율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60대 이상 노인의 이혼상담 건수가 10년 전에 비해 여성은 3.7배 증가한 반면 남성은 8.3배나 늘었다. 이 중에서도 70ㆍ80대가 각각 24.3배, 11배로 폭증했다. 그 이유로 조경애 법률구조1부장은 “옛날처럼 안 되니까”를 꼽았다. “아내는 남편이 미우니까 용돈도 안 주고 집안 어른으로 정당한 대접을 안 해주죠. 남편은 그걸 못 참으니까 이혼하겠다고 나서는 거고요.” 조 부장은 “황혼이혼은 어제오늘 문제로 다투는 게 아니라 오래 묵고 곪은 상처가 터져서 하는 것”이라며 “이만하면 됐다, 이제는 그만 놔버리겠다 하는 분들이고, 오랫동안 힘들어하던 부분이 있어서 하는 것이라 말리기가 힘든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아내가 명절에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가는 등 혼자서만 취미생활을 한다(60대 남성) ▦동생 빚 보증으로 재산을 날린 후 대화가 단절된 아내가 말도 없이 몇 달간이나 여행을 가버렸다(70대 남성) ▦지병이 있는 나를 놔두고 아내가 전 재산을 챙겨 가출했다(80대 남성) 등이 지난해 남성노인들의 대표적 이혼 상담 유형이었다.

황혼의 행복한 부부관계를 위해

“젊어서부터 잘 살아야죠.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주고, 대화도 되고 그런 부부여야 합니다. 부부갈등이 생기면 그때그때 해소해야 하고요.” 가정법률상담소 조경애 부장은 가장 좋은 모델로 “서로가 서로의 가장 좋은 친구인 부부”를 꼽았다.

친구 같은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세계가 있어야 한다. 쓰나미처럼 부부를 덮치는 육아와 가사, 직장일의 와중에서도 공유의 기반을 단단히 다지려는 노력을 방기해선 안 된다. 새로운 즐거움을 공유했던 흥분되는 기억이 주기적으로 부부 사이에 산소처럼 공급돼야 한다.

공정함에 대한 감각도 중요하다. 육아ㆍ가사노동, 재정, 부모 부양, 애정표현 등 부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공정한 균형감각이 관철돼야 한다. 일방의 손해 본다는 느낌, 억울하다는 감정은 언젠가 반드시 터지게 돼 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타라 파커-포프는 행복한 결혼생활의 요소를 과학적으로 추출한 책 ‘포 베터(For Better)’에서 흥미로운 법칙을 제안한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통념과 달리 결혼생활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실제로 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헌신, 친밀성, 신뢰, 관계에 대한 만족 표현 등은 그저 느껴서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은 반드시 표현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작은 행복에 법석을 떠는 사람일수록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가능성이 높다.

갈등이 없는 부부는 세상에 없다. 중요한 건 무엇 때문에 갈등하느냐가 아니라 그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느냐다. 영국 자선투자기관 NPC가 2013년 발간한 보고서 ‘내가 64세일 때 누가 나를 사랑해줄까?’에 따르면, 건강, 경제력, 관계(부부ㆍ가족ㆍ친구)는 노년의 행복을 위한 필수 3요소다. 하지만 공공복지는 건강과 경제력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관계의 중요성은 방치하고 있다. 보고서는 “관계야말로 행복의 유일한 제1 조건임을 수많은 연구 결과들이 입증하고 있다”며 “황혼이혼은 일차적으로 배우자가 상호 제공하는 돌봄서비스 비용을 사회로 이관하며, 이로 인해 영국 경제가 치르는 사회적 비용이 매년 460억 파운드에 달한다”고 지적했다.

가정법률상담소 조경애 부장은 “우리나라는 사회적으로 혼인교육 시스템이 너무 취약해 심각한 부부 갈등을 겪어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며 “이혼으로 치닫지 않고도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조언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담소를 찾은 수많은 노인들이 생전 처음 이런 데 와본다는 말을 많이 해요. 의논하고 싶어도 갈 곳이 없었다는 말을 들으면 너무 안타깝죠.”

황혼이혼은 100세 시대를 맞은 우리 앞에 새로이 대두한 필연적 고민거리다. 그러나 언제 종결하든 그 결혼이 바람직하고 건강한 것일 필요는 있다. 마땅히 그러하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유해린 인턴기자(이화여대 국문학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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