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도 따뜻한 미국 도시들이 미 전역에서 몰려드는 노숙자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저소득 계층이 늘어나고 주거비용 상승 문제가 겹치면서 거리로 내쫓기는 노숙자들이 증가하고 있는데다, 미국 전역에 있는 노숙자들이 동사 위험이 있는 추운 지역을 피해 사계절 내내 따뜻한 남부 몇몇 도시들로 대거 이동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노숙자들의 수도’라는 오명을 달게 된 도시들까지 속속 등장하는 지경이다. 하와이와 로스엔젤레스(LA)는 올해 밀려드는 노숙자로 급기야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나 발령하는 ‘정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들 지역에서는 노숙자 급증으로 마약밀매와 폭력사건 등 강력범죄가 증가하는 것은 물론 한낮에도 길거리에 나앉아 구걸을 하거나 술에 취한 채 거리를 방황하는 노숙자들로 주요 산업인 관광산업도 적지 않은 타격을 받고 있다. 노숙자를 구제하고 싶어도 주정부 예산에 비해 유입되는 노숙자의 수가 턱없이 많아 주정부가 사태를 바로잡을 만한 능력을 상실한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노숙자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서 도시가 기능을 상실해 영구히 슬럼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하와이, 노숙자 급증에 정부 비상사태 선포
하와이 주정부는 노숙자가 약 7,000명 이상으로 급증하자 지난달 19일 정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데이비드 이게 하와이 주지사는 “노숙자 문제가 하와이의 가장 시급한 문제로 대두했다”면서 “이들이 묵을 거처가 턱없이 부족하고, 이들이 관광지 곳곳에 머무르면서 인해 주요산업인 관광업에도 막대한 손실을 끼치고 있다”고 AP에 밝혔다.
하와이 노숙자 수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인구수가 약 140만명인 하와이의 노숙자 수는 올해 기준으로 약 7,620명으로 집계됐다. 하와이 주정부의 노숙자 관리책임자인 스콧 모리시지는 “하와이 인구 10만명 당 노숙자가 465명으로 인구 대비 노숙자 비율로는 미국 50개주에서 가장 높은 실정”이라며 “특히 최근 급격한 증가추세는 위협적 수준이다”라고 AFP에 말했다. 미국 민간기관인 노숙추방전국연대(NAEH)에 따르면 하와이의 노숙자 수는 매년 10% 이상씩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와이에 노숙자가 증가하는 데는 일차적으로 저임금과 고물가, 막대한 주거비용 등 사회구조적 원인이 크다. 하와이 북서쪽의 와이아나에 지역에 있는 최대 규모의 노숙자 캠프에는 대부분 하와이 원주민들이 머물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도 주거비용을 감당할 수 없자 길거리에 텐트를 쳐놓고 생활하고 있다.
여기에 겨울이 없는 온난화 기후 탓에 미국 본토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로 넘어오는 일명 ‘이민 노숙자’까지 가세하면서 문제가 커지고 있다. 미국 본토에 있던 노숙인들은 구걸이나 정부보조금 등을 모아 하와이로 향하는 편도행 비행기 티켓을 구입한 후 하와이에 도착해 그대로 눌러앉고 있다. 미국 북서부 오레건주 출신으로 얼마 전 하와이로 온 노숙자인 마이클 마르틴카(55)는 “하와이는 노숙자가 살기에 매우 좋은 환경이어서 정부 보조금을 모아 비행기 티켓을 구매했다”면서 “내 형도 하와이의 마키키 지역에서 노숙자로 살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에 말했다.
노숙자 증가는 하와이의 관광산업에 직접적 타격을 주고 있다. 관광객을 위한 편의시설을 노숙자가 차지하면서 길거리에 설치한 화장실은 이용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졌다. 또 와이키키 해변 등 관광명소에는 구걸을 하거나 마약이나 술에 취해 길바닥에 잠이 든 노숙자들로 가득 차 관광객들이 발길을 돌리고 있다. 게다가 밤이 되면 우범지역으로 변하면서 범죄 위협도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하와이 주정부, 강경책 선택했다 부작용 속출
상인들의 불만이 폭증하자 하와이 주정부는 초반에 노숙인 문제에 투옥과 벌금이라는 강경책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말 커크 켈드웰 호놀룰루 시장은 오전 5시부터 오후 11시 사이에 상업지구의 길거리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모습이 적발될 경우 1,000(약 113만원)달러의 벌금을 부과하거나 한 달 동안 구류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또 노숙자가 원할 경우 미국 본토로 떠날 수 있는 비행기 티켓을 대신 구입해주기로 했다. 눈 앞에 보이는 노숙자들을 관광명소에서 몰아내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와이키키 상업진흥회의 릭 에그드 회장은 “관광객에게 구걸하는 노숙자들을 없애는 조치가 될 것”이라며 “노숙자들이 와이키키의 공공장소를 차지하는 것을 우리가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노숙자들에게 확실히 알려줘야 한다”고 환영하는 입장을 알자지라 방송에 밝혔다.
법안 시행 이후 길거리에서 노숙자들이 눈에 띄지 않으면서 켈드웰 시장의 ‘채찍’이 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는 결국 단순한 눈속임에 불과했던 것으로 드러나며 노숙자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는 지적이다. 막대한 벌금 부과는 노숙자들을 빚더미에 올려놓으면서 이들이 지니고 있던 사회 복귀에 대한 일말의 희망마저도 무너뜨리는 비수로 작용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하와이 주정부의 강경책은 노숙자들을 가난의 악순환에 빠지게 했다”며 “한 쪽이 줄어들면 다른 쪽이 커지는 ‘풍선 효과’처럼 노숙자들은 사람들이 안 보이는 뒷골목으로 숨어들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올해 5월에는 미국 여대생이 와이키키 해변에 앉아 친구들과 밤 늦도록 담소를 나누다 경찰의 단속에 걸려 체포되기도 했다. 현지언론 하와이뉴스나우는 “경찰이 노숙자를 쫓아내기 위해 무분별한 단속을 벌이고 있다는 증거”라며 “벌금으로 전과 기록이 남게 되면 미국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들은 다시 하와이에 올 수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노숙자 수는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약 25%가 늘었다.
LA ‘노숙자의 도시’ 오명
LA도 하와이와 상황이 비슷하다. LA 시는 올해 9월 노숙자 문제로 인해 정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지난 1994년 대지진으로 약 64명이 사망해 정부 비상사태를 선포한 이후 처음이다. LA 시의 노숙자서비스부(LAHSA)에 따르면 노숙자는 올해 기준으로 4만4,359명으로, 해마다 약 7,000명의 노숙자가 LA로 새로 유입되는 추세다. 문제는 노숙자 중 약 30%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거나 마약 상습 복용자라 범죄율 증가의 원인이 되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LA에 노숙자가 증가하는 것은 하와이와 같이 사계절 온난한 기후와 저임금, 높은 실업률 등이 요인으로 꼽힌다. 특히 LA의 노숙자 문제에는 불법 이민자 급증도 한 몫을 하고 있다. 민간단체인 퓨리서치센터(PRS)에 따르면 LA에는 약 1,100만명의 불법 이민자가 있는데 세금도 내지 않는 이들이 도시에 거주하면서 주거 비용이 가파르게 상승해 애꿎은 원주민들이 노숙자로 쫓겨나고 있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미국 CNN은 저소득계층이 많이 살던 구도심은 전형적인 젠트리피케이션(임대료가 치솟아 원주민들이 쫓겨나는 현상)으로 공동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LA에서 미 공화당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의 인기가 높은 것도 그가 불법 이주민을 ‘도둑’이라고 비유하는 등 강경발언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노숙자인 데니스 스콧은 “불법 이민자는 떵떵거리고 살고 있고 우리는 대신 거리로 쫓겨났다”며 “이주민의 정체를 아주 잘 알고 있는 트럼프에게 한 표를 던질 것”이라고 말했다.
노숙자 문제 채찍보다 지원강화가 효과
노숙자 문제의 해결은 채찍보다는 주거 지원을 골자로 한 정부 지원이 해답이라는 데에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결국 노숙자가 길거리에서 사는 이유는 높은 주거비용에서 일차적으로 발생하는 만큼 그 가난의 고리를 끊고 이들이 새 출발 할 수 있도록 기반을 잡아주는 것이 노숙자 문제 해결의 기본이라는 것이다. 미국 유타주가 2014년 도입한 정책 사례에 따르면 노숙자에게 집을 제공해주는 것만으로도 노숙자 수를 한 해 동안 약 72%까지 감소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유타 주정부의 주거개발부 국장인 고든 워커는 “노숙자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면 이들에게 주거 장소를 제공하는 게 가장 우선적인 일”이라고 워싱턴포스트에 말했다.
단속을 강화했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 이게 하와이 주지사도 최근 정부 지원을 골자로 한 노숙자 복지강화로 노숙자 정책을 변화하고 있다. 하와이 주정부는 현재 샌드아일랜드 근처에 화물용 컨테이너를 개조한 주거타운을 조성하고 있는 중이다. 대신 와이키키에 있던 노숙자 거주촌은 공권력을 동원해 철거했다. 버스를 태워 정부가 조성한 주거타운으로 이주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LA 시도 노숙자 문제 해결을 위해 약 1억달러(약 1,133억원) 규모의 예산을 책정해 지원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저임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저임금제 상승, 노숙자 주거시설 건축, 정부 주거보조금 지원 등 다양한 대책을 실시할 계획이다. 하지만 워낙 노숙자 수가 많은 탓에 재정 마련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에릭 가세티 LA 시장은 “바다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면서도 “약 30분마다 한번씩 길거리에서 노숙자가 시신으로 발견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도 당장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LA 시는 노숙자 문제를 해결하는데 부족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연방 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상태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