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강한 능력을 지닌 악당이 지구를 위기에 빠트릴 때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슈퍼맨과 원더우먼이라는 하늘에서 내려온 초인, 배트맨과 아이언맨이라는 첨단 과학기술의 결정체들이다. 미국 코믹스(만화)에서 탄생해 이제는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통해 전세계인에게 신봉되는 히어로들은 현대판 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코믹스는 현대판 신화에 다름 아니다(사실 신과 히어로가 지구를 지키기 위해 동급으로 등장하는 ‘어벤져스’도 이미 나오지 않았던가). 김민수가 그린 가로 6m, 세로 4m의 민화에는 부처 예수 신령 등 신성시되는 존재와 미국의 슈퍼히어로들이 함께 한다. 이처럼 만화 속 캐릭터가 현대인들에게 주는 영감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만화는 비로소 현대미술이 된다.
대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애니마믹 비엔날레 2015~2016’에 참여한 21명의 한ㆍ중ㆍ일 작가들은 김민수의 작품처럼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현대미술에 이어붙이려 시도하는 이들이다. 애니메이션과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차용하거나, 만화적인 회화를 그린 330여점의 전시 작품들은 만화가 더 이상 하위문화(서브컬처)가 아닌 현대미술의 일부임을 강변한다.
무거운 주제의식과 예술성을 추구하는 ‘그래픽 노블’ 스타일의 작품은 주류 미술에 보다 가깝다. 중국 작가 순 쉰(孫遜)은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목판화 애니메이션으로 중국 정부의 예술 검열을 우회하고자 했다. 그의 영상작품 ‘지난 용의 해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2012년 보시라이(薄??) 충칭시 당서기의 실각을 두 마리 용의 난투극으로 풍자했다. 닭이 난입해 엉망진창이 된 상황에서 연주를 계속하는 오케스트라는 위기 앞에서 구태의연한 권력자들의 태도를, 침대에 누운 남자가 책을 읽다 개의 먹이로 던져주는 장면은 정치 현실에 대한 무신경을 표현한다.
일본의 망가에서 유래해 한국 만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모에(萌え)’ 그림체는 현대인의 숨겨진 욕망을 드러낸다. ‘모에’는 ‘(좋아하는 마음이) 싹튼다’는 뜻으로 ‘오타쿠(하위문화를 깊게 파고드는 사람들)’들이 좋아하는 큰 눈의 미소녀 캐릭터를 가리킨다. 소녀를 연모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모에 그림체는 숨기고 싶은 욕망의 덩어리다. 일본 작가 미스터(Mr.)는 이를 거대한 그림으로 확대해 미술관에 걸어놓음으로써 오타쿠의 욕망을 세상에 드러낸다. 여성 작가인 다카노 아야는 남성 중심적 모에의 한계를 지적한다. 다카노는 멍한 눈과 자극적이지 않은 신체로 모에를 변형, 성인이 되기를 유예하는 소녀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숨은 성별 권력을 뒤집은 것이다.
대구와 중국의 상하이 베이징 홍콩 마카오, 대만 가오슝 등 6개 도시에서 순차적으로 열리는 애니마믹 비엔날레는 대만 출신 기획자 빅토리아 루가 2004년 대만당대미술관에서 연 전시 ‘픽션.러브’에서 기원했다. 그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영향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세대가 미술작가로 성장해 이 때의 감각을 표출하고 있다”며 ‘애니마믹’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그는 “장기적으로 애니마믹 예술이 서구의 현대 추상주의 예술을 대체할 것”이라 예측하기도 했다. 애니마믹 비엔날레는 2007년부터 상하이 현대미술관을 중심으로 중국과 대만에서 세 차례 열렸고 대구미술관은 2013년 네번째 행사부터 참여했다. 2016년 2월 14일까지. (053)790-3000
대구=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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