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0일 오후 3시30분. 슬슬 마감의 압박이 다가올 시각에 사건팀 부팀장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내일, 마카오, 성공적”으로 요약되는 부팀장의 말 한 마디에 급하게 홍콩행 비행기(그것도 편도행) 티켓을 끊고 다음날 마카오로 향했습니다. 최근 불거진 야구선수, 중견기업인 등의 마카오 원정도박 실상과 현지 조직폭력배와의 연관성 등을 심층 취재해보라는 취지였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빅뱅 마카오 콘서트’를 보러 몰려든 팬들 때문에 미리 숙소를 예약해놓고 출발하는 것마저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정보 획득의 어려움’은 현지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서울에서 출발 직전 급하게 섭외해 둔 취재원들을 마카오 도착 당일 만났지만, 그들은 어딘가 배타적인 눈빛을 띤 채 대부분의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심지어 한 취재원은 기자의 계속되는 질문에 “내일 동이 트면 마카오 특급 호텔을 돌아다니며 오너들한테 물어보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삼합회와 관련돼 있다거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쉽게 만나지 못한다는 소문이 도는 이들을 직접 만나보라는 뜻인데, 조소와 비아냥이 담긴 말이었겠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현지 한인들 대부분은 마카오 카지노가 최근 언론의 뭇매를 맞는 통에 사업이 위축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합니다. 갑자기 나타나 여기저기 정보를 캐고 다니는 낯선 기자에게 배타적인 모습을 취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죠.
꼬박 하루 동안 막혀 있던 취재가 풀린 건 결과적으로 ‘칩’ 덕분이었습니다. “직접 바카라를 체험해보라”는 회사의 엄명을 받고 퍼블릭 게임장 칩 교환소를 두리번거리고 있던 기자에게 현지 교민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손님들에게 접근해 정킷방을 소개해주고 롤링비를 받는 현지 에이전트였습니다. 당장 현금이 없다는 기자에게 환전 업자를 소개해주고, 칩 교환 방법과 바카라 게임 규칙 등을 원 포인트로 강의해준 이 남성 덕분에 르포 취재에 탄력이 붙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현지 에이전트들은 한인 관광객을 상대로 1분만 이야기 해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게임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그 절박함의 수준이 판가름 된다고 합니다. 대화를 섞어본 뒤 단순히 ‘오락’을 위해 게임을 하러 온 사람이라 판단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뜨고, 당장 절박하게 게임을 하겠다는 관광객(쉽게 말해 도박 중독증상이 보이는 관광객)은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는 의미였습니다. 나중에 기자라는 신분을 밝힌 뒤 가진 술자리에서 이 남성은 “현금도 없이 칩 교환을 하려던 눈빛을 보고 (기자를) 도박 중독자로 착각했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여하튼 이 남성을 통해 다음날부터 다양한 도박업 관계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소개해줄 때마다 이 남성이 신신당부했던 요구사항은 “게임을 갈구하는 눈빛을 유지하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남성의 말처럼 행동하자 현지 관계자들과 어울리는 일이 한결 쉬워졌습니다. ‘살아있는 정보’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죠. 거기다 (취재차) 바카라 게임을 하기 위해 실재하는 칩을 손에 쥐자, 기자라는 신분을 밝혔음에도 많은 편의와 정보가 쏟아졌습니다. 기자의 현금을 홍콩달러로 환전해준 환전업자는 동료들에게 전화를 걸어 “지방 연고팀 소속 야구선수들이 게임을 하러 왔었다”는 제보 내용을 재차 확인해줬고, 한 앵벌이는 자신이 정킷방에서 목격했던 유명 기업인들의 모습을 그림 그리듯 묘사해주었습니다. 심지어 한 정킷방 관리자는 기자를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가 게임을 했던 장소로 안내해주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카지노에서 제공하는 차량을 이용해서 말이죠. 진작 알았더라면 택시비로 날렸던 출장비를 아낄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칩의 위대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바카라 게임을 통해 기자가 환전한 돈을 모두 잃은 사실을 확인하자, 앵벌이는 또 다른 한인 관광객을 물색하러 미련 없이 나섰습니다. 현금이 다 떨어졌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서, 정킷 관리자와 환전업자들도 “바쁘다”는 말만 반복하며 기자와의 대면을 피했습니다. 유일하게 기자와 ‘호형호제’하게 된 한 관계자만이 “원래 마카오에서는 칩이 곧 힘”이라며 기자를 다독였습니다.
26일 오전 홍콩을 거쳐 인천으로 떠나는 길에 한 현지 교민이 배웅을 나왔습니다. 그는 “칩을 좀 땄으면 헬기를 타고 홍콩으로 갔을 텐데…”라며 아쉬워했습니다. 마카오 ‘큰 손님’들에게는 약 4,000홍콩달러의 헬기 이용이 무료로 제공되기도 한다면서 말이죠. 역시 마카오에서는 칩을 따냐 못 따냐에 따라 대접이 크게 달라지는 모양입니다.
한국에 돌아와 관련 기사를 내보내자 현지 한인들로부터 수많은 제보 메일이 오고 있습니다. 이들은 악덕 정킷 관리자들을 고발하며 그들과 연관된 또 다른 운동선수들과 기업인들의 이름을 거론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제보자들이 악덕 정킷 관리자들에게 ‘낚여’ 큰 돈을 잃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외부 사람에게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현지 한인들을 ‘적극적 제보자’로 탈바꿈시키는 힘 또한 칩에서 나온 셈입니다. ‘칩의 위력’ 덕분에, 마카오 원정도박 취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박주희기자 jxp93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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