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 사업, CEO역량이 절대적… 평생학습으로 뒷받침해야”
“‘숨어서 남을 돕고 살아라’ 불명(佛名)에 충실, 이윤 사회 환원할 터”
IMF(국제통화기금) 경제한파로 창업열기가 꽁꽁 얼어붙은 1997년, 부산에 남자도 어렵다는 제조업 분야에서 여성 CEO가 탄생했다. 김경조(59ㆍ사진) 대표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 경성산업을 창업해 혹독한 IMF를 견뎌내고 지금은 회사를 든든한 반석에 올려놓았다.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부산상공회의소 특별상의의원, 한국경제인협회 부산지회 부회장, 부산시의회 의정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두 아들의 어머니이자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종부(宗婦)이기도 한 그는 한 해 9번의 제사도 꼼꼼히 챙긴다.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선문답처럼 “용불용설”(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발달하고 그렇지 않으면 퇴화한다는 진화설)로 답하는 여장부, 김 대표를 만나봤다.
-경제사정이 좋지 못할 때 창업했는데
“1997년 3월 3일 자본금 5,000만원으로 부산 사상구 괘법동에서 자동차 부품 제조업을 시작했지요.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IMF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줄도산이 이어지던 때였습니다. 당시 은행의 자기자본(BIS)비율 상향조정으로 주 거래처가 흑자도산을 맞아 대금 결제(3,000만원)를 받지 못했습니다. 자본금 5,000만원으로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큰 금액이었지요. 이듬해 1월 채권단과 함께 그 회사를 찾아갔더니 대표가 현금이 융통되지 않을 뿐 건실한 회사니 고비만 넘기면 꼭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도산하면 도망가기 바쁜 당시 상황에서 회사를 다시 일으키겠다고 말한 것이지요. 실제 5년에 걸쳐 용케 대금을 받았습니다. 어려운 경제상황 탓에 1998년 6월 30일 회사를 폐업하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남편이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에 절실함이 덜했지만, 곧 바로 남편이 퇴직해 계속 사업을 하라는 계시인가 싶어 이를 물고 사업을 이어갔습니다.”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녹록치 않았을 텐데
“1990년대 후반에만 해도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별로 없던 때라 거래처에서는 저를 동물원 원숭이 쳐다보듯 하기도 했지요. 여성은 유통, 보험, 교육 등 특정 분야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있었지요. 거래처 경비원에게 보험사 직원이나 잡상인으로 취급 받기 일쑤였습니다. 그럴 때면 해인사 암자인 백련암의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백련암에 상주하셨던 성철스님은 내게 ‘절은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작업’이라고 했습니다. 3,000배를 올리며 생각을 바로 잡고 더욱 겸손하게 노력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사회생활은 힘든 만큼 보람도 컸지요. 거래처에서 계약을 성사시킬 때면 속상했던 기억이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종갓집 종부(宗婦)이자 두 아들의 엄만데
“창업 당시 40대 중반이라 아이들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고민은 종갓집 종부 역할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었지요. 사업 초기 4대 봉제사를 지내느라 한 달에 1번 이상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1년에 13차례 제사를 지낸 적도 있었지요. 더구나 우리 집 어르신들은 내가 만든 음식이 아니면 안 드셨습니다. 손수 제사음식을 만들고 치우는 일에는 이틀이나 걸려 제사를 한 번 지내고 나면 앓아 눕기도 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 진화론자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처럼 사람은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있는 것 같아요. 여성 사업가들에게 주어진 일과 가사의 양립문제는 숙명과 같았지요. 식구들의 이해도 큰 힘이 됐습니다. 삼시세끼 밥을 챙겨주지 못해 아이들이 밥 대신 빵을 먹을 때면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일하는 엄마, 워킹맘이 대센데
“워킹맘, 우아한 표현이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지요.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 등은 여성의 경제활동에 있어서 큰 어려움이자 저출산 문제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탄력근무제, 재택근무, 아이 돌봄 서비스 등 각종 지원책이 있지만 실효성 부분은 사회가 더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퇴직 압박 등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공감대 확산을 위해서는 여성들의 경제활동 범위도 넓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서비스 업종, 카페 창업 등 한정된 범위만 고집하지 말고 제조업 등 광범위한 분야에 대한 도전도 필요합니다. 소규모 창업의 대세로 꼽히는 카페 프랜차이즈 사업도 3년 안에 자리를 잡지 못하면 성공하기 힘들지요. ‘맨땅에 헤딩’이 힘들다면 관련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해야겠지요. 저는 창업 후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팔려야 선순환 구조가 이뤄진다는 생각에 대학원에서 마케팅(경영학 석사)을 공부했고 여성기업은 약하다는 편견을 깨려고 논문(경제학 박사)을 쓰기도 했지요. 성공적인 사업을 위해서는 CEO의 역량이 절대적이고 이는 평생 학습에서 이뤄진다고 봅니다.”
-향후 계획은?
“성철스님에게 받은 불명(佛名)이 천동장(天童藏)입니다. 스님께 남성스러운 불명을 붙여주신 이유를 물었더니 ‘숨어서 남을 돕고 살라’는 의미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처럼 아너소사이어티(사회공동모금회)나 외국인 근로자 돕기, 초록우산, 부산구치소교정위원회, 수영구장학재단 활동 등을 통해 기업 이윤을 작은 사회 환원으로 이어갈 생각입니다. 또 기업 본연의 목표인 매출 증대를 위해서도 노력할 것입니다. 창업 당시 직원 1명, 연매출 1억9,000만원에서 출발해 지난해에는 종업원 11명, 매출 65억원으로 성장했습니다. 향후 직원 15명에 연 매출 100억원 규모로 키우는 것이 단기 목표입니다. 소모성 자재이기 때문에 거래처 확보가 가장 중요한데 이는 마케팅 분야의‘20대 80 법칙’(상위 20% 거래처가 매출 80%를 기록한다는 법칙)을 지켜 달성할 생각입니다. 신뢰 구축을 통해 한 해 좋은 기업 2~3곳만 거래처로 추가 확보한다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수시장에 집중해 안정적인 기업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한편 미국, 일본, 멕시코, 인도네시아 등 수출비중도 7~8% 수준으로 유지해나갈 생각입니다.”
정치섭기자 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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