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 깨고 유책주의 예외 첫 적용
"별거 25년… 혼인의 실체 없고
자녀들에 수억원 경제적 지원
부인 여유 있어 축출이혼 아니다"
혼인파탄의 책임을 따지는 게 무의미 할 만큼 결혼생활이 망가졌다면, 바람난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예외적으로 받아줘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최근 대법원이 유책주의의 예외사유를 인정한 이후 나온 첫 하급심 판결이다.
서울가정법원 가사항소1부(부장 민유숙)는 유책 배우자인 남편 A(76)씨가 부인 B(66)씨를 상대로 낸 이혼 소송에서 원고 청구를 기각한 1심을 깨고 이혼을 허용했다고 1일 밝혔다.
45년 전인 1970년 결혼한 두 사람은 성격 차이로 잦은 다툼을 벌이다 10년 만에 협의이혼을 했다. 3년 뒤 자녀 양육 문제로 재결합 했지만 이내 다시 사이가 벌어졌고, 급기야 남편 A씨가 가출하기에 이르렀다. A씨는 이후 아내 B씨와 자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1990년부터 25년째 다른 여성과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며 혼외자식까지 낳았다.
A씨는 이 과정에서 한 차례 이혼소송을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중혼 상태를 유지해왔다. 그 사이 A씨와 B씨는 장남 결혼식을 위해 만난 것을 제외하고는 연락도 하지 않고 살아왔다. 이후 2013년 A씨가 이혼소송을 냈으나 1심은 ‘결혼 파탄의 책임이 있는 사람은 이혼소송을 낼 수 없다’는 유책주의를 들어 A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하지만 2심은 지난 달 23일 선고를 통해 이들의 이혼을 인정했다. ‘결혼이 파탄 났다면 그 책임을 따지지 않고 이혼을 허용하자’는 파탄주의를 인정한 것이다.
재판부는 “부부관계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탄이 난데다, 혼인생활 강제가 일방 배우자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된다”며 “이들에게는 ‘혼인을 계속할 수 없는 중대 사유’라는 이혼원인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혼인파탄에 대해 A씨의 유책성을 인정한 뒤, 그렇다고 A씨의 이혼 청구를 배척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책임이 남아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25년간 별거하면서 혼인의 실체가 완전히 사라졌고, A씨의 책임도 그 경중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희미해졌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축출이혼 우려에 대해서도 “A씨가 그간 자녀들에게 수억원의 경제적 지원을 해왔고, B씨도 경제적 여유가 있어 이혼을 허용해도 ‘배우자를 쫓아내는’ 축출이혼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덧붙였다.
지난 9월 대법원은 대법관 7대 6 의견으로 유책주의를 유지시켰으나 예외적으로 파탄주의를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예외적 사유로는 ▦유책 배우자가 책임을 면할 수 있을 정도로 상대 배우자와 자녀에 대해 보호ㆍ배려한 경우 ▦혼인파탄 기간이 오래 돼 책임의 경중을 따지는 게 무의미한 경우 ▦혼인의 지속의사 없는 악의적 이혼거부 ▦축출이혼의 우려가 없는 경우 등을 제시했다.
김관진기자 spiri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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