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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100여년 전 한중일 공동안보체제 제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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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100여년 전 한중일 공동안보체제 제창하다

입력
2015.11.01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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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테러리스트다.”

지난 해 봄 일본정부 대변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그렇게 못 박았다. 일본의 우파 정객들은 다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안중근이 바란 것은 평화였다. 평화주의자 안중근이 한 사람의 의사(義士)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역사의 비극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40분, 하얼빈역 플랫폼에서였다. 일본의 거물정치가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고위 인사와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때 안중근이 이토에게 세 발의 총알 세례를 퍼부었다.

첫 발을 쏘았을 때는 러시아 군악대의 요란한 음악소리 때문에 총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두 번째 총성이 울리자 사람들은 비로소 큰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눈치 챘다. 하지만 당황한 탓에 러시아 군대는 주춤했다. 안중근은 침착하게 셋 째 발을 날렸다. 모두 이토에게 명중했다. 늙은 정객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안중근은 탄창에 남은 세 발은 현장의 일인 고관들에게 쏘아댔다. 어떤 이는 팔에 맞고, 다른 이는 머리가 깨졌다. 그날의 거사는 완벽한 성공이었다.

이를 확인한 안중근은 권총을 내던지고 “대한국 만세!”를 외쳤다. 그러고는 순순히 오랏줄을 받았다. 일본 경찰은 안중근을 마차에 태워 뤼순으로 이송하였다.

이토의 죄상 첫 째는 “동양평화 파괴”

“나의 거사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지키는 데 있다.” 1905년 문제의 이토는 한국의 주권을 빼앗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어버렸다. 이토로 대표되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중국 및 러시아와도 잇달아 전쟁을 벌이며, 한중일 3국의 평화를 짓밟았다. 안중근은 그 죄를 물어 이토를 처단한 것이었다.

일제의 취조가 시작되자 안중근은 주저 없이 자신의 견해를 천명했다. 그는 뤼순 감옥에 이감되자마자 이토의 죄상을 15가지나 적어서 제출할 정도였다. 그 중 첫째는 ‘동양평화의 파괴’였다. 일제는 안중근을 사형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면서도 저들은 한 가지 흉계를 꾸몄다. “네 목숨을 살려줄 테니, 공판정에서 조선국왕의 명령으로 이토를 죽였다고 자백하라.” 그런 강요에 굴복할 안중근이 아니었다. “목숨을 아낄 내가 아니다. 그토록 목숨이 아까웠더라면 이런 큰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질없이 다른 궁리 하지 말고 죽일 테면 어서 죽이라는 질책이었다. 저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이미 몇 해 전부터 안중근은 노령지방에서 의용군을 이끌고 와,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제와 사투를 벌였다. 그러던 중 때마침 이토가 하얼빈에 와서 러시아와 모종의 협상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안중근은 이를 다시없는 기회로 여겼다. 그는 우덕순, 유동하 등과 협력해 이토를 없애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그때는 대중매체가 아직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 안중근은 이토의 얼굴사진조차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먼발치에서 이토를 정확히 찾아내어 사살하였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마지막 편지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고향에 있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비보를 듣자, 날밤을 새워 아들이 저승길에 입고 갈 명주 수의를 손수 마련했다. 어머니는 그 수의를 뤼순으로 보낼 때 한 통의 편지를 함께 부쳤다.

어머니의 편지는 “장한 아들 보아라”로 시작되었다.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분노를 짊어진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이 대의를 위한 것인 줄 정확히 인식하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한없이 슬퍼하면서도 자랑스러워하였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진정한 우국지사가 아니고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격절한 말씀이었다. “아마도 이 편지가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일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잘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애끊는 슬픔을 억눌렀다. 어머니는 그 “장한 아들”이 마지막 가는 길에 죽음마저 무색하게 하는 강단으로 애틋한 사랑을 표현하였다. 이런 어머니가 계셨기에 그처럼 의로운 아들도 있었을 것이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아들은 어머니가 눈물로 지으신 수의를 입고 저승길을 떠났다. 32세였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났을 때 조마리아 여사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백범 김구 선생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청년 시절 백범은 안중근의 부친에게 신세 진 적이 있었다. 백범은 그때의 일을 잊지 않았다. 조마리아 여사는 상하이에서도 애국지사들이 존경하는 어머니셨다. 2008년 8월, 한국정부는 뒤늦게나마 여사의 영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바쳐 후손의 도리를 실천했다.

한중일 공동의 화폐ㆍ안보체제 역설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서문(序文), 전감(前鑑), 현상(現狀), 복선(伏線) 및 문답(問答)의 차례로 서술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시일이 촉박하여 글의 완성을 보지는 못했다. 겨우 서문과 전감을 저술하는데 그쳤다.

‘서문’에서 안중근은 19세기의 세계가 제국주의에 물든 나머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잘못된 길을 헤매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서구열강의 침략도 부당하지만, 총칼로 이웃나라를 침략해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 역시 그릇되었다고 그는 호되게 나무랐다.

이어서 그는 ‘전감’의 지면을 빌려 근대사의 다섯 가지 문제점을 거론했다. 첫째가 청일전쟁의 침략적 성격이요, 둘째는 러시아의 극동정책과 일본의 한반도 침략정책이었다. 셋째로 그는 러일전쟁의 원인을 깊이 통찰하였고, 그 일에 관한 서구열강과 한국의 입장 차이를 밝혔다. 넷째로 러일 강화조약이 왜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체결되어야 했는지를 따졌다. 끝으로, 일제의 대륙침략이 어떤 점에서 그릇되었는지를 논박하였다. 이처럼 안중근은 국내외 정세를 진단하며 동양 3국의 평화를 옹호했다.

‘동양평화론’의 저술을 마치지 못하였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작고하기 40일쯤 전에 그가 자신의 평소 견해를 다음의 4가지로 요약 정리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다.

첫째, 안중근은 뤼순을 영세중립지대로 정하고 거기에 상설위원회를 두어 동양 3국의 분쟁을 방지하자고 했다. 둘째, 이 세 나라가 공동출자하여 은행을 설립하고, 공동의 화폐를 발행하여 서로 돕자고 주장했다. 셋째, 3국은 공동안보체제를 구축하고 공동으로 평화유지군을 창설하자고 제안하였다. 끝으로, 뤼순의 3국위원회를 명실상부한 국제기구로 키워 로마 교황청 등 세계 각국의 공인을 받자고 강조하였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미완으로 남았으나 웅대한 포부였다. 혹자는 유럽연합의 경제통합과 유엔평화유지군의 원형을 안중근에게서 찾기도 할 정도다. 어쨌거나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국가존망의 위기 속에서 그는 한중일 3국의 평화와 번영을 꿈꾸었다. 지구를 광포하게 휩쓴 제국주의의 불길에 맞서 정치, 경제, 군사, 외교적 측면에서 새 질서를 세우고자 했으니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저 한 나라의 국익만 추구한 테러리스트라서 이토에게 총을 겨눈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을 후세는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안중근이 세상을 뜬지 벌써 100년도 넘었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아직도 실천에 옮겨질 기미가 없다. 자유무역을 한다고 하지만 미국, 일본, 중국 등 강대국은 여전히 패권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한국은 2개의 적대국가로 분열되어 아직도 그들의 눈치를 보는 형편이다. 또한 협소한 지역주의와 파벌주의, 당치도 않은 이념 논쟁에다 부적절한 역사 논쟁으로 쓰러질 지경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자유롭고 독립된 조국을 염원”한 안중근에게 죄스럽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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