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억원 대 럭셔리카나 무시무시한 성능을 발휘하는 슈퍼카일 필요는 없습니다. 남들 눈에 그저 그래 보여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면 차주에게 그 어떤 차보다 소중한 ‘애마’일 겁니다. 지난 25일 한국일보와 온라인 커뮤니티팀 테스트드라이브가 인천 엠파크에서 개최한 ‘카쇼(Car Show)’에서도 나만의 소중한 차들이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신차들이 주인공인 휘황찬란한 모터쇼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차들입니다.
23년을 함께 한 가족의 역사
카쇼 행사장 제일 끝에 현대자동차의 1992년식 그랜저 한 대가 오전 일찍부터 자리를 잡았습니다. 흔히 ‘각 그랜저’라 부르는 1세대 그랜저입니다. 1995년 공전의 히트를 친 SBS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조폭들이 애용해 ‘모래시계 차’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랜저는 이번 카쇼에 나온 차들 중 연식만 따지면 1991년식 메르세데스-벤츠 560SEL 다음으로 오래된 차였지만 관리가 무척 잘 돼 있었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직선 차체가 클래식한 분위기를 마구 풍겼습니다. 알루미늄 휠과 브레이크만 교체했고 나머지는 원형 그대로입니다. 차 주인인 양석철(46ㆍ자영업)씨가 그만큼 애정을 쏟았다는 의미죠.
그는 “1인 오너 차 중에서 가장 오래 됐을 것”이라며 “젊은 사람들은 관심이 없지만 50대 이상은 각 그랜저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고 했습니다. 하긴 당시 각 그랜저는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아 온 이들은 진한 향수를 느낄 겁니다.
양씨의 그랜저는 중화요리집을 운영하던 부모님이 23년 전 뽑은 가족의 첫 차입니다. 눈 코 뜰새 없이 바빴던 부모님은 부의 상징을 구입했지만 사실상 차는 아들이 탔다고 합니다. 23년을 함께 한 가족의 차여서 지금은 차가 3대로 늘었어도 양씨에게 가장 소중하답니다. “물려 받은 중화요리집은 5년 전 접었지만 이 그랜저만은 끝까지 함께 갈 겁니다.”
이 차는 나의 관(棺)
벤츠의 2인승 경차 스마트는 앙증 맞은 디자인이 매력입니다. 카쇼에도 스마트 동호회가 다양한 모델을 한 자리에 전시해 볼거리를 제공했는데, 그 중에서도 뚜껑이 열린 2인승 빨간색 스포츠카가 단연 눈에 띄었습니다. 지금은 단종된 2005년식 ‘스마트 로드스터 452’입니다. 국내에 20대 정도만 있는 희귀종이죠. 출판 무역업을 한다는 차주 박용병(45)씨는 빨간색 두건과 선글라스로 차 못지 않은 포스를 뿜어 냈습니다.
엔진 배기량이 700㏄에 불과한 2인승답지 않게 차문은 하늘을 향해 열리는 ‘걸윙(Gull Wing) 도어’이고 엔진은 정통 스포츠카처럼 뒤에 있습니다. 전면 보닛 아래가 트렁크죠. 영국에서 팔린 차여서 스티어링 휠이 오른쪽에 붙어 있습니다.
박씨는 오래 전부터 이 차를 사고 싶었지만 국내에는 눈을 씻고 찾아도 매물이 없었답니다. 그러다 4년 전 자동차 업계에 있는 지인에게 한 영국 유학생이 이사 화물로 들여 와 매물로 내놓았다는 얘기를 듣고 딱 하루 고민한 뒤 바로 질렀습니다.
고민한 이유는 오른편 핸들이었는데 운전을 해보니 금방 익숙해졌고 운전의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고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차체가 작으니까 민첩하고 주차가 편리합니다. 스마트가 작다고 생각하는데 2명 타는 공간만 놓고 보면 어느 차보다 실내가 넓습니다.”
80㎞를 정속으로 달린 뒤 측정한 실연비가 30.6㎞/ℓ였고, 평소에 대충 타도 20㎞/ℓ는 너끈하다니 연비도 참 착합니다. 박씨에게 “팔면 가격은 얼마나 할까요?”라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습니다. “절대 안 팝니다. 나중에 제 관으로 쓸 겁니다.”
초등학생이 자라 핸들을 잡다
국내에서도 많이 타는 BMW 미니는 차체가 작아도 엔진이 강한 차입니다. 작다는 미니 중에서도 그야말로 초미니가 카쇼에 등장했습니다. 조현후(24ㆍ학생)씨가 몰고 온 ‘40주년 한정판 미니’입니다. 은은한 은색 차체의 1999년식 미니는 250대만 생산됐습니다.
외관만큼이나 수동 기어가 달린 내부도 정말 아담하고 단출했습니다. 그래도 빨간색 가죽 시트가 어우러져 제법 올드카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역시 차체는 무척 낮았습니다. 운전석에 엉덩이를 대 보니 조금 과장해 거의 맨 바닥에 앉은 것 같았습니다.
국내에서 보기 힘든 미니 40주년 한정판은 조씨 삼촌이 구입한 차였답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조씨는 집에 세워 둔 삼촌의 차를 보며 자랐습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차는 부쩍 늙었고 성인이 된 아이는 이제 그 차를 운전하고 있습니다. 키 180㎝가 넘는 체격에 작디 작은 차가 불편할 것 같았지만 그는 “전혀 불편하지 않고 운전이 재미있다”고 했습니다. 운전이 재미있는 이유가 더 재미있습니다. “차체가 워낙 낮아서 바닥을 그대로 느끼며 달리는 게 매력입니다.”
14년의 기다림 끝에 만난 너
최원준(49ㆍ내과의사)씨는 스스로 “4륜 구동에 수동 변속기 마니아”라고 했습니다. 그런 그가 15년 전 귀여운 차 한대에 마음을 홀딱 빼앗겼습니다. 폭스바겐이 2001년에 딱 250대만 생산한 ‘뉴 비틀 RSi’입니다. 3,200㏄ 6기통 가솔린 엔진에 4륜 구동이고 수동 6단 변속기가 장착된 차로 폭스바겐의 고성능 모델 R의 시초입니다. 외관과 달리 모터스포츠의 첨단 기술이 적용됐고 그때만 해도 획기적인 탄소섬유와 알루미늄을 사용한 실내 마감도 엄청나게 고급스러운 전설적인 차입니다.
독일에서 205대, 일본에서 45대만 팔렸고 국내에는 이 차가 한 대도 없었습니다. 당시 일본 판매가격이 무려 1,000만엔에 달했다고 합니다. 한화로 1억원 가까운 돈인데 14년 전 가격이라니 그야말로 후덜덜합니다.
이 차에 꽂힌 최씨는 해외 사이트를 뒤져 매물이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250대의 차주 중 아무도 팔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지난해 일본 중고차 경매에 한 수집가가 내놓았습니다. 올해 카쇼에 전시된 차입니다.
최씨의 뉴 비틀 RSi는 한 곳도 튜닝하지 않은 100% 순정품이었습니다. 그 자체가 국내에 한 대뿐인 특별한 차라 손댈 이유도 필요도 없었습니다. 얼마 전 공개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100대가 넘는 수입차 컬렉션에도 이 차가 없었으니 말 다했습니다.
RSi 기어 노브 옆에 155번째 RSi란 고유번호가 붙어 있습니다. 15년 전 생산됐지만 구입 당시 1만2,800㎞ 밖에 달리지 않아 상태는 신차 수준이었습니다. 그는 “15년간 술 담배도 하지 않고 모은 돈으로 어렵게 구입한 차여서 더욱 소중하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창피했지만, 이게 카쇼다
어젯밤 주차된 차가 이동하지 않고 남아 있는 줄 알았습니다. 카쇼에 컨테이너 이송용 만(MAN) 트랙터(TGX 540) 한대가 떡 하니 서 있었으니까요. 그것도 행사장 정 가운데에 말입니다. 알고 보니 이 트랙터도 전시차였습니다.
그동안 카쇼를 구경만 하다 올해 처음 참가한 차주 예준호(36)씨는 미니쿠퍼S와 함께 만 트랙터를 끌고 왔습니다. 트랙터는 모델명처럼 최대출력 540마력을 발휘합니다. 역대 전시차 중 가장 크고 힘 좋은 녀석입니다.
150대의 전시차 중 유일한 화물차여서 어색할 것 같았지만 전혀 아니었습니다. 운전석을 개방한 트랙터에 하루 종일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거대한 트랙터의 운전석에 앉아보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엄청난 관심을 보였습니다. 곧 트레일러 면허 시험을 본다는 한 남성은 예씨를 찾아와 실물을 놓고 평소 궁금했던 것을 이것저것 묻기도 했습니다.
만 트랙터 가격은 2억원에 육박합니다. 게다가 가계를 꾸려가는 중요한 자산입니다. 다른 이들이 마음껏 보라고 선뜻 내놓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저야 매일 일하는 공간이지만 애들은 트랙터를 굉장히 신기해 했죠. 다른 아이들도 그럴 거 같아 전시했습니다. 해외 카쇼에는 화물차도 많이 나오니까요.”
카쇼는 차주와 차주, 차주와 관람객이 자동차라는 공통 주제를 통해 자발적으로 모여 정보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이점이 거대 자본이 개최하는 모터쇼와 큰 차이죠. 그런 의미에서 예씨의 트랙터는 올해 카쇼의 당당한 주인공이었습니다. 트랙터의 예상 밖 인기에 예씨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습니다. “다들 승용차만 전시해 창피했는데 아이들이 즐거워 하니 나오기를 정말 잘했습니다.”
글ㆍ사진=김창훈기자 ch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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