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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아베가 한국 역사교과서를 말한다면

입력
2015.10.29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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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아베 신조 일본 총리. AP=연합뉴스

지난해 1월 외교부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 인터내셔널 판에 실린 ‘정치인과 교과서(Politicians and Textbooks)’라는 사설 때문이었다. 사설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반영하기 위해 고교 역사 교과서 개정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아베 총리가 일본군 위안부 이슈를 교과서에서 빼려 한다고 지적하고, 박 대통령은 일본 식민통치기와 해방 후 독재를 묘사한 교과서에 근심이 깊다고 꼬집기도 했다.

압권은 두 사람의 집안 얘기다. 사설은 아베 총리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가 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었다는 점, 박 대통령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군 장교이자 1962년부터 79년까지 남한의 군부 독재자였다는 사실을 적시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전쟁과 (일제) 협력에 예민해 하는 (공통의) 가족사가 있다”라고 치명타를 날린다.

당시만 해도 박 대통령이 취임 후 일본에 강공을 이어가던 때였다. 아베 총리의 극우 행보 때문에 국내외 반일 여론이 고조된 상태였다. 그런데 교학사 교과서 문제로 인해 아베 총리와 박 대통령이 도매금으로 묶여 국제사회의 망신을 사게 됐으니 한국 정부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결국 외교부는 뉴욕총영사 명의의 반박문 게재를 시도했고, 한 달 뒤 같은 신문에 글이 실렸다. “한국 정부는 교과서 집필이나 승인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민간 출판사가 저술하고 학계 전문가로 구성된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교과서 검정 위원회의 승인을 받는다.” 그러면서 한국의 교과서 편찬 및 검정제도를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와 비교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한바탕 소동으로부터 1년 8개월이 흘렀다. 그런데 이제 같은 사설이 나와도 우리 외교부는 더 이상 반박을 못하게 생겼다. 국정 교과서를 만들게 되면 정부가 교과서 집필이나 검정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못할 테니.

아베 총리는 2006년 9월 집권했다. 아베 1기다. 하지만 1년 만에 물러났고 2012년 12월 2기 재집권까지 일본 우익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전략을 가다듬었다. 일본 평화헌법에 대해 “헌법 전문은 패전국이 승전국에 바친 반성문이나 마찬가지다. 자기 손으로 만든 헌법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주권국가라 할 수 있다”며 목소리를 높인 그다. 그리고 재집권 후 자위대 활동 확대로 대표되는 안보법제 개편으로 한 발 한 발 나가고 있다. 그 바탕에는 ‘자랑스러운 일본 역사, 자신감 있는 보통국가 일본’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관점을 강조하고 교육하겠다는 노골적 의도도 내비치는 상황이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보자. 아베 총리의 우경화 행보를 가장 강하게 비판하던 박 대통령이 ‘올바른 역사 세우기’라는 미명 하에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시도하고 있다. 도대체 아베 총리와 무엇이 다른 건가. “희망을 주는, 미래가 보이는, 밝은 역사로 써야 한다. 산업화에 성공해 자랑스러운 나라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써야 한다”는 국사편찬위원장의 발언은 어떤가. 영화 ‘암살’에서 매국노 강인국이 “반도의 빈국 조선이 일본과 합병 후 활발한 산업경제 국가가 됐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이던 장면이 떠올랐다. 87년 형식적 민주화 이후 쌓아온 최소한의 사회적 상식이 이렇게 무너지고 있다.

11월 2일 한일 정상이 만나면 위안부, 자위대 문제 등 모든 현안에선 의견이 맞설 게 분명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비슷한 가족사를 바탕으로 ‘자랑스러운 역사만 쓰는 교과서’를 두고는 뜻이 일치할 것 같다. 아베 총리가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혹여 한국의 역사 교과서 문제를 언급한다면 우리는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이런 씁쓸한 장면을 상상만 해도 속이 쓰리다.

정상원 정치부기자 orn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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