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겨울 전남 고흥군의 한 주택에서 60대 할머니와 6살 손자가 화재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전기요금 15만원 남짓을 내지 못해 촛불을 켜고 자다가 발생한 사고였다. 전기요금 미납자 가구의 전기사용량을 제한하는 전류제한조치가 사고의 원인으로 지적을 받아 결국 한전은 전류제한 유예조치의 조건을 크게 완화됐다.
하지만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2014년 송파구에 거주하던 세 모녀가 생활고에 시달리던 나머지 집세와 공과금 70만원을 남긴 채 자살하는 일이 벌어지자 복지정책의 무력함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한전은 같은 해 전기공급약관까지 바꿔가며, 동절기에만 한시적으로 운용했던 전류제한 유예조치를 사실상 상시적인 제도로 바꿨다.
난방을 시작하는 11월 즈음이면 저소득층의 에너지 빈곤 문제가 생각이 나는 건 비단 나뿐 만은 아닐 테다. 에너지 부족으로 일어나는 불행한 사고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전기요금을 제 때 낼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가정이라면 쉽게 인식하긴 어렵겠지만, 우리나라의 에너지 빈곤층은 130만~200만 가구를 헤아린다. 2014년 전기요금 할인 혜택을 받은 대상도 229만 가구에 이른다.
정부가 이런 문제를 해소하고자 내달 1일부터 에너지바우처 발행을 위한 접수를 시작한다. 정부가 에너지 기본권을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유관 정책을 시행하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에너지 바우처 제도가 과연 실효성이 있을 것인가 하는 건 따져보아야 할 문제다.
에너지 바우처 제도란 에너지 취약계층에게 에너지 이용권을 지급하여 난방에너지 구입을 지원하는 제도다. 에너지 바우처로 올해 12월부터 내년 3월까지 전기, 도시가스, 등유, 연탄 등을 선택해 구입할 수 있다. 겨울철 난방에너지는 생존권과 직결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타당한 조치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4개월 동안 지급되는 지원비가 가구당 총 10만원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한 달에 2만 5,000원을 지원하는 꼴인데, 2014년 국내 가구당 한 달 평균 연료비는 11만원이었다는 점, 겨울철에는 난방비로 인해 연료비가 2배 수준으로 급등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언 발에 오줌 누기 수준이다.
또 연탄이나 등유를 지원받는 경우에는 에너지 바우처 대상자에서 제외되는데, 등유 지급액은 31만원, 연탄 지급액은 16만 9,000원이어서 에너지 바우처를 선택하면 오히려 복지 혜택이 줄어든다. 현재 한전이 전류제한 유예조치를 통해 지원하는 금액이 월 4만 4,000 원에 이르고, 도시가스 회사들도 동절기에는 기초생활수급자 기준으로 2만원 이상의 요금을 감면해주고 있다. 에너지 바우처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수준인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정부도 할 말은 있다. 에너지 바우처는 난방비 전체를 지원하는 게 아니라 일부를 보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지만, 이건 ‘사회복지’ 혹은 ‘기본권 보장’이라는 국가의 책무를 개별 기업에 떠넘기는 데 불과하다. 게다가 쓰고 남은 에너지 바우처는 내년 4월에 전기요금에서 차감한다고 하니, 그냥 생색내기 수준에 지나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게다가 난방 형태나 집의 단열 성능이 좋아지지 않는 한 저소득층의 겨울철 에너지 부족 문제는 근원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에너지 복지 제도가 안착한 미국의 경우, 에너지 요금을 지원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집수리를 통해 저소득층 주택의 단열 효과를 높여주는 주택에너지효율화 프로그램이 더 중점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40년 전부터 시작된 이 정책으로 미국의 에너지 빈곤층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평가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혜택을 받을 수 없고 초기 예산이 많이 필요하다는 난점이 있긴 하지만, 효과가 의심스러운 대증요법 대신 긴 호흡을 가지고 끈질기게 바꿔가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이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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