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8년 봄 정월(1월)에 이찬 실죽(實竹)을 장군으로 삼고, 일선군 땅의 장정 3천 명을 징발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과 굴산성(屈山城)을 개축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쓰여있는 굴산성에 관한 기록이다. 소지마립간 8년은 486년이다. 4신라와 백제가 동맹을 맺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인데, 이 때 이미 신라는 삼년산성(충북 보은군)과 굴산성(충북 옥천군)을 쌓아 서쪽 금강 유역의 백제를 겨냥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선점한 것이다. 68년 뒤인 554년 백제가 신라를 침공했을 때 이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백제는 성왕이 전사하며 한반도 중부에 대한 패권을 상실하는 치명타를 입었다. 굴산성은 신라가 한강을 장악하고 삼국을 통일하게 된 출발점인 셈이다.
옥천군과 국강고고학연구소가 5일부터 굴산성으로 추정되는 옥천 이성산성(已城山城)을 발굴한 결과를 29일 1차 발표했다. 발굴 결과 이성산성은 5세기에 토성으로 처음 축조된 후 6세기 말에서 7세기 사이에 토성 외부에 돌을 쌓아 개축한 것으로 드러났다. 토성의 중심부에는 선문(線文) 기와 조각과 고배(高杯ㆍ굽다리 접시) 조각이 발견됐는데 이는 이성산성이 5세기에 축조됐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차재동 국강고고학연구소장은 “지금까지 이성산성과 인근에 있는 저점산성 둘 중 하나가 굴산성으로 추정돼 왔는데 이번 발굴 조사 결과로 보면 이성산성이 굴산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는 성곽 서벽에 해당하는 길이 약 25m의 성벽(충북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 산 29번지 일원)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조사된 성벽의 최대 높이는 외벽을 기준으로 약 3.5m다. 성벽의 중심이 되는 토루(土壘ㆍ흙더미)의 조성방식은 나무로 만든 틀에 흙을 켜켜이 다져 넣는 판축기법(版築技法)으로 밝혀졌다. 발굴 과정에서 판축 때 판재를 지지하는 나무기둥인 영정주(永定柱)가 확인됐다. 조사 지역의 남쪽에는 돌무더기가 발견됐는데, 발굴단은 위치로 보아 전망대를 설치한 자리로 추정했다.
차 소장은 “이번 발굴을 통해 신라의 초창기 돌성인 삼년산성과 동시대에 설치된 신라 후기 토성이 어떤 방식으로 축조됐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국강고고학연구소는 30일 오후 2시 발굴현장을 공개할 예정이다.
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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