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콩쿠르인 퀸엘리자베스(5월), 차이코프스키(7월), 쇼팽(11월) 콩쿠르가 한 해에 열린 2015년, 그 중 두 대회를 한국인 연주자가 석권하며 클래식음악계는 ‘단군 이래 최대 경사’를 맞았다. 20년 만에 한번 온다는 ‘콩쿠르 대전의 해’에 출전 연주자들만큼이나 바쁜 사람들이 있다. 지난 10여년 간 젊은 연주자들을 발굴, 지원해 온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음악사업팀이다.
젊은 연주자들의 세계적 성과 뒤에 금호영재콘서트가 있다는 건 이제 통설이다. 예약 판매만으로 쇼팽콩쿠르 실황 앨범이 음반차트 상위권을 휩쓸고 있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을 비롯해, 올해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인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 부조니콩쿠르 우승자 피아니스트 문지영, 뮌헨 ARD콩쿠르 2위인 소프라노 이수연, 리즈 콩쿠르 2위인 피아니스트 김희제가 모두 금호영재콘서트를 통해 데뷔했다. 1998년부터 14세 미만 음악 영재를 선발해 독주회를 열어주는 프로그램이다. 웬만한 국제 콩쿠르 본선 진출자가 모두 ‘금호 영재’ 출신이다 보니 콩쿠르 수상자가 나오면 금호문화재단이 언론에 알리고, 올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는 아예 담당 직원을 현지 파견할 정도다. 어떻게 금호영재콘서트는 될성부른 떡잎을 제대로 알아보는 걸까.
스승 배제, 잠재력 보고 선발
이루리 금호아시아문화재단 홍보담당은 “선발 오디션 응모자에게 사사한 스승을 모두 적어내게 한다. 통틀어 한 번에 120여명이 응모하는데, 한 명이라도 가르친 제자가 있는 전문가는 심사위원에서 제외시킨다”고 말했다. 일례로 영재 오디션 단골 심사위원이던 첼리스트 정명화는 2000년대 중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교육원에서 청소년들을 가르치면서 심사위원을 그만 뒀다. 매번 바뀌는 심사위원은 오디션 당일 시험장에서 공개되고, 이후 홈페이지에 게재된다. 오디션 합격 후에도 사사한 스승이 심사위원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면 합격이 취소된다.
이렇게 선정된 심사위원들은 인맥을 모두 배제하고 영재들의 ‘가능성’만을 보고 절대 평가한다. 박선희 재단 음악사업팀장은 “매년 5월 10월 영재를 뽑을 때마다 심사위원들에게 기교나 실수 여부보다 음악적 잠재력을 봐달라고 요청한다”고 말했다. 1시간 분량의 독주를 할 역량이 있는지도 살펴 짧은 곡만 소화할 수 있거나 긴 곡의 하이라이트 부분만 연주할 수 있으면 돌려보낸다. 김의명 교수는 “당장의 기량이 아닌 잠재력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연주를 두고 심사위원의 의견이 엇갈리기도 한다. 4~5명의 심사자가 필요한 이유”라고 덧붙였다.
조성진이 신기초 4학년이던 2004년, 영재콘서트 심사위원이었던 조영방 단국대 교수는 평가란에 “대가 같은 무대였다. 태도가 좋으며, 많은 발전이 기대된다”고 적었다. 3년 후 그를 가르친 신수정 전 서울대 교수와 노미경 교수도 각각 “장래가 유망해 보인다” “즉흥성이 돋보였다”고 썼다. 임지영은 예원학교 1학년이던 2007년 “왼손의 테크닉이 좋고, 오른손의 보잉을 보완하면 좋겠다” (송재광 이화여대 교수)는 평을 받았다.
이런 시스템은 ‘돈 있는 집이나 예술을 한다’는 통념을 깼다. 조성진, 임지영 모두 아버지는 평범한 회사원, 어머니는 주부다. 역시 영재콘서트로 데뷔한 피아니스트 손열음, 김선욱의 부모님은 각각 고등학교, 초등학교 교사다. 문지영의 아버지는 기초생활수급자다. 박 팀장은 “현악기의 경우 악기가 고가라 부유층이 많은 게 사실이지만,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도 (재능만 보고 선발하니) 지원을 주저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어려도 음악가로 대우한다
오디션에 통과한 연주자들은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1시간 분량의 독주회를 열어야 한다. 이때 연주곡은 모두 스스로 짠다. 박 팀장은 “어리지만 음악가로 인정해 연주곡을 스스로 정하도록 한다. 곡목을 재단에 제출하면 이를 검토해 연주회에 맞지 않는 곡에 대해 재선정하도록 권유한다”고 말했다. 독주회 실력이 탁월하면 오디션 없이 추가 기회를 준다. 2005년 독주회에서 조성진의 천재성을 발견한 금호는 2007년 다시 조세원(바이올린) 김진승(첼로)와 함께 필로스 트리오를 구성해 피아노 삼중주 무대를 열어줬다. 금호영재콘서트가 교육을 담당하지는 않지만 무대 경험이야말로 음악 영재들에겐 중요한 동기부여다.
음악 외에 세계 무대 진출을 위한 후방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루리홍보담당은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연주 실력 외에 유명 지휘자, 기획자들과의 관계 등이 작동한다. 연주자들이 요청하면 해외 음반사, 기획사와의 계약서도 검토해준다. 메이저 콩쿠르에 직원들이 나가 연주자들을 발로 뛰며 홍보한다”고 말했다. 2003년 재단이 손열음을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던 로린 마젤에게 소개하기 위해 만찬을 열어 협연을 주선한 일화는 유명하다.
매년 여름 아시아나 승무원 교육관들이 무대 워킹, 자세, 테이블 에티켓, 자기소개 방법, 메이크업 방법을 가르치는 매너스 스쿨을 열고, 연주회에 쓸 프로필 사진도 찍어준다. 재단 관계자는 “영재 오디션 초반인 90년대 후반, 고 박성용 회장이 영재들을 데리고 테이블 매너부터 가르쳤다. 해외 지휘자, 음악 관계자들과 만날 때 ‘쫄지 말라’는 의도였는데, 2004년부터 아예 계열사 직원들이 프로그램을 정해 가르친다”고 설명했다.
영재 출신 99%가 음악 전공
영재콘서트를 통해 데뷔하는 연주자는 1년에 평균 50여명. 이렇게 데뷔한 연주자들이 다시 오디션을 거쳐 만 15~25세 사이의 ‘영아티스트 콘서트’ 무대에 다시 서는 비율이 80%에 달한다. 박 팀장은 “14세 미만 영재 지원비로 재단이 쓰는 1년 예산은 1억5,000만원에 불과하지만, 영재로 데뷔해 음악을 계속 전공하는 연주자가 99%다. 돈보다 중요한 건 꾸준한 관심이다. 주변에서 격려하고 칭찬하면, 재능을 가진 연주자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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