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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교 대치 한복판서 '이성의 시대' 기다린 에라스무스

입력
2015.10.2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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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홀바인의 에라스무스 초상화
한스 홀바인의 에라스무스 초상화

나는 에라스무스 폰 로테르담이 그 편에 가담해 있는지 알아보려 했다. 그러나 어떤 상인이 내게 대답했다.

“에라스무스는 늘 자기 자신만을 대표하죠(Erasmus est homo pro se).”

슈테판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 평전’(정민영 옮김, 아롬미디어)의 제사(題詞)로 ‘무명인사 서한집(1515)’의 저 구절을 썼다. 그가 나치 등쌀에 유럽(런던)을 뜬 1934년에 낸 책이다.

에라스무스는 1466년 오늘(10월 27일) 태어난 네덜란드 인문주의자다. 가톨릭 성직자의 사생아로 태어나 수도사가 된 뒤 “농부가 밭을 갈면서(도)”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리스어 복음서를 라틴어로 옮기고 주석을 단 사람이다. 라틴어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당시의 농부가 얼마나 됐을까 싶긴 하지만, 그의 뜻은 종교권력자들이 독점하고 변질시킨 복음을 빼앗아 민중과 나누는 데 있었다. ‘우신 예찬’과 더불어 그의 번역 성서는(아니 성서 번역의 정신은) 16세기 루터 교회 개혁의 문화적 거름이 됐다.

하지만 에라스무스는 관용과 평화를 사랑했고, “눈먼 말”처럼 내닫던 루터의 독단과 독선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유럽을 피바다로 만든 종교전쟁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1515년 ‘격언집’에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에게만 전쟁이 아름다워 보인다”는 유장한 제목의 글을 실었다. 그에게서 인정받고 그를 제 곁에 서게 하려던 권력자 루터는, 끝내 엇나가는 에라스무스를 한 편지에서 “독사”에 비유했다. 츠바이크는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루터에게는 종교였고, 에라스무스에게는 인간이었다”고 썼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종교’에서, 가톨릭이 추구한 권력을 보았다.

그러니까 에라스무스는, 신ㆍ구교의 두 권력이 관용 없이 대치하던 일촉즉발의 16세기 유럽 한복판에, 양쪽의 창날 앞에 오직 ‘자신만을 대변(pro se)’하며 홀로 서 있었던 것이다. 그 국면, 그 자리, 에라스무스의 바로 그 정신에서 인문주의의 우람한 나무가 자라났다고, 츠바이크는 판단했다.

사실 ‘평전’은 에라스무스를 앞세워 츠바이크가 풀어놓은 복화(腹話)같기도 하다. 한스 홀바인의 에라스무스 초상화를 두고 쓴 이런 구절. “의연한 체념의 그늘이 그의 이마를 덮는다.- 아, 그는 세상의 이 영원한 어리석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가벼운, 아주 고요한, 확신의 미소가 그의 입가에 맴돈다. 경험이 풍부한 그는 알고 있다. 언젠가는 지쳐 사라지는 것이 모든 격정의 성향임을. 스스로 지쳐버리는 것이 모든 광신의 운명임을. 영원한 것, 조용히 인내하는 것, 즉 이성은 기다릴 줄 알며 견뎌낼 줄 안다. 다른 것들이 흥분해 소란을 피울 때, 이성은 침묵해야 하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성의 시대는 온다, 언젠가 다시 그 시대는 온다.”

에라스무스는 가난과 고독 속을 떠돌다 1536년 스위스 바젤에서 병으로 숨졌고, 츠바이크는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피난지 브라질 페트로폴리스에서 자살했다. 그들이 못 본 ‘그 시대’는 늘 저만치 있는 것일까.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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