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뉴스일까? 홍콩의 투자금융회사인 ‘딥날리지벤처스(Deep Knowledge Ventures)’는 인공지능 프로그램 ‘바이탈(VITAL)’을 지난해 5월 13일부로 신규 이사에 임명했다. 바이탈은 ‘에이징애널리스틱스(Aging Analytics)’라는 영국계 기업의 제품으로, 건강 분야의 시장 정보를 탁월하게 분석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24시간 내내 일하는 ‘인공지능 이사님’은 전 세계에서 수집한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검토해 자금조달 동향을 분석하고, 성공적인 투자 예측을 위한 기계학습을 반복한다. 딥날리지벤처스는 바이탈에게 신규 회사 투자에 대한 결정을 자동으로 승인하고 수행하는 업무 일체를 맡길 계획이라고 했다.
SF 영화에서나 봄 직한 이 소식은 전 세계 언론에 소개되며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정작 금융계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저 이를 과장광고로 받아들였다. 바이탈의 의사결정 알고리즘을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더 뛰어난 프로그램이 금융계에서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이사는 SF도 아니고 미래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아주 흔한 일이다. 전 세계 금융거래의 90% 이상이 전적으로 알고리즘에 의존하고 있다. 이 시스템에 이상이 생길 경우 2008년 금융위기 때처럼 세계 경제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자동화된 돈의 소용돌이에 전 세계인의 운명이 얹혀 있는 셈이다.
인공지능과 안전사고 공존하는 사회
디지털 신자유주의의 상층부에 돈밖에 모르는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와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뒤섞어 놓은 사이보그들이 군림하고 있다면, 최하층부에는 삽과 곡괭이를 들고 광산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소셜 네트워크에 딥날리지벤처스의 과장광고가 화제에 올랐던 같은 날, 터키 소마 석탄 광산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301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은 대참사였다. 사고 원인은 세월호 사태와 놀랍도록 비슷하다. 소마 광산 민영화가 2005년부터 시작되면서, 비용절감과 이익창출을 이유로 안전장치 설치가 무시됐다.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해야 했을 정부는 오히려 각종 규제를 완화했다. 대참사의 징후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광부들 사이에서 감지되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광산 경영진과 정부의 대책은 안일하기 짝이 없었고, 언제 사고가 날지 알 수 없는 갱도에서 광부들은 알아서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금융 시스템에 입출력되는 숫자를 사람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는 파국을 맞고야 만다. 윤리는 숫자로 코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인공지능은 없다. 인간의 윤리마저 인공지능의 자동화 프로세스에 떠넘기는 사회라면 당장 망해도 이상할 게 없다.
소마 광산 참사 이후 터키 노동조합은 총파업을 선언했다. 터키 전역으로 거리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학생들은 광부들의 안전모를 쓰고 정부 퇴진 구호를 외쳤다. 경찰은 최루가스와 고무 총알을 난사하며 무자비한 진압에 나섰다. 터키 전역에서 17일 동안 데모가 계속됐고, 8,000명 이상이 다쳤다. 사망자도 11명에 달했다. 터키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전 세계로 발신됐다. 터키 정부는 자국민의 트위터와 유튜브 접속을 막고, 치안 부대를 동원해 정부 비판 글을 게재한 사람을 색출했다.
광산 노동 없이 디지털산업도 없어
소마 참사 당시엔 총리였고, 석 달 뒤 터키 최초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런 사고는 광산에서 늘 생깁니다. 사고 없는 일터라는 건 없습니다. 과거의 영국을 생각해 보세요. 1862년에 광산 붕괴가 생겨 204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1866년에는 361명이 죽었고요, 1894년에는 폭발 사고로 290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과 같은 사고가 다른 곳에서는 결코 생기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이런 일은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걸 ‘사고’라고 부릅니다.”
에르도안은 마르크스가 노동자의 비참한 삶에 경악했던 시절의 역사를 들먹이며,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소마 광산 사고와 같은 일은 생기기 마련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논평을 내놨다. 디지털 신자유주의의 한복판에서 이 말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는 인공지능 이사가 회사를 경영하는 하이테크놀로지 시대를 좇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선 노동자를 잔인하게 착취하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 19세기 수준의 자본주의가 공존한다. 광산과 인공지능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디지털 산업은 광산 노동 없이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마에서 생산된 석탄은 발전소로 공급된다. 그리고 모든 디지털 기술이 의존하는 기본적인 에너지 원천인 전기를 생산한다. 휴대폰의 원재료인 콜탄(columbite), 백금, 구리, 희토류 등 지하광물도 디지털 산업에 꼭 필요한 원천 자원이다. 이 광물들은 소마보다 더 위험한 노동 환경에서 채굴된다. 최근 몇 년간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 광물을 둘러싼 갈등도 심각한 상황이다. 돈이 되는 돌은 피를 부른다.
디지털 광물을 둘러싼 세계 대전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자본’에 이렇게 썼다. “자본은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 있는 노동을 빨아먹어야 살 수 있으며, 더 많은 노동을 빨아먹을수록 더 오래 사는 죽은 노동이다.” ‘자본’의 첫째 권이 출간된 것이 1867년이었다. 앞서 에르도안이 말했던, 361명의 사망자를 낸 영국 광산 사고가 있고 난 이듬해 발표됐다. 소마 광산의 3㎞ 지하 지점에서 수습된 광부들의 새까맣게 탄 시체는 제자리걸음 중인 역사를 고발한다. 단언컨대 디지털 신자유주의는 앙시엥레짐(ancien regimeㆍ구체제)이다. 스마트폰을 손에 쥔 20억명의 흡혈귀가 구체제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고혈을 빨고 있다. 자각 없는 소비는 생산 과정에 투여된 노동 가치를 쉽게 잊어버리게 하고, 소비 트랜드가 가속될수록 이런 현상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한다. 노동을 착취하는 자본도 문제지만, 노동이 우리 삶의 동의어라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잊어버릴 때 구체제는 한층 견고하게 연장된다.
쉽게 바꿀 수 없는 질서라면 이 체제의 맨 밑바닥으로만 전락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일 따윈 국경 바깥 저 너머로, 일상생활을 하면서 굳이 떠올려야 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장소로 떠밀어버리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잊고 살 수 있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탄탈룸의 원석인 콜탄은 아프리카 콩고 광산에서 채굴되는데, 어린이와 인신매매된 노예가 가혹한 노동에 동원될 뿐만 아니라 중앙아프리카 종족 분쟁과 군사 충돌의 원인이기도 하다. 중국 팍스콘 공장의 100만 노동자는 24시간 교대 근무를 반복하며 애플의 주력 상품을 비롯해 각종 ICT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 이곳의 노동환경도 가혹하기 짝이 없어서 2010년엔 광둥성 선전 공장 한곳에서만 10여명 이상의 노동자가 연속으로 자살했다. 디지털 문화의 매끄러운 표면 뒤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1996년부터 지금까지 콩고민주공화국의 콜탄 광산에서 사고로 죽거나 반군에게 희생된 주민은 약 500만에서 7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콜탄 광산의 이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군사 충돌로 난민이 된 사람들의 수는 200만명을 넘어섰다. 사망자와 난민 규모로만 보면 중앙아프리카에서 세계대전이 벌어진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실제로 이 지역으로 유입되는 국제 자본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이고, 콩고의 비극에 세계 전체가 연루됐다. 디지털 강국이라는 한국 기업도 직간접적으로 얽혀 있다는 사실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수출과 인간윤리, 무엇이 중요한가
변화의 조짐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긴 하다. 미국은 2014년 5월 31일 분쟁광물 규제 법안을 발효했다. 미국의 모든 상장사가 ‘분쟁광물 사용 여부’를 증권거래위원회에 의무적으로 보고하고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유럽연합(EU)도 분쟁광물 규제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그린피스는 해마다 친환경적인 정보기술(IT) 기업 순위를 발표하고 있다. 군사 충돌 없는 지역에서 생산된 원료로 제작되었는지를 증명하는 내용이 순위를 나누는 기준에 포함된다.
이런 시도가 어떤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특히 한국의 각성이 필요하다. 분쟁광물 문제를 수출 길에 방해되는 거추장스러운 규제쯤으로 여겨선 안 된다. 이 나라야말로 더 많은 노동을 빨아먹을수록 더 오래가는 구체제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악순환은 반도의 국경에 갇혀 있지 않다. 수출만큼이나 인간의 윤리를 중요시하는 사회가 되지 못한다면, 안으로부터 깨지고 갈라지는 내파사회(內破社會)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임태훈ㆍ인문학협동조합 미디어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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