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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한을 화폭에…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영원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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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한을 화폭에…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영원속으로'

입력
2015.10.22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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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천경자 화백의 그림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에는 천경자가 즐겨 그렸던 꽃, 여인, 뱀이 모두 들어있다. 천경자는 22세 때 첫 결혼의 실패를 경험하고 그 아픔을 화폭에 그대로 옮겼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천경자 화백의 그림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에는 천경자가 즐겨 그렸던 꽃, 여인, 뱀이 모두 들어있다. 천경자는 22세 때 첫 결혼의 실패를 경험하고 그 아픔을 화폭에 그대로 옮겼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2층 상설전시실에 걸려 있는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8월 6일 사망한 것으로 22일 알려진 고(故) 천경자 화백의 대표작 중 하나다. 그가 자주 그렸던 꽃, 여인, 뱀이 한 화폭에 등장하는 이 작품은 천경자의 삶과 예술을 대변한다. 나이 쉰셋에 그린 이 자화상에서 결혼에 실패한 스물두 살의 천경자는 머리 위에 고통의 뱀이 똬리를 틀고 가슴에 창백한 장미가 매달려 있지만, 덤덤하게 정면을 응시한다. 그림 그대로 천경자는 운명적이었으나 고통에 당당히 맞선 삶을 살았다.

천경자의 죽음은 유족의 함구로 두 달이나 늦게 알려졌다. 장녀 이혜선씨는 22일 한 언론에 “병석에 계시던 어머니가 8월 6일 새벽 5시쯤 잠자듯 평안하게 돌아가셨다”며 “어머니 시신은 화장해 뉴욕의 한 성당에서 조용히 장례를 치렀다”고 밝혔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이씨가 8월 천 화백의 유골함을 들고 전시실을 방문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1924년 전남 고흥군에서 태어난 천경자는 1941년 전남여고를 졸업한 후 집안의 반대를 뿌리치고 도쿄에 있는 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했다. 재학 중 외할아버지를 모델로 그린 ‘조부’가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다. 그러나 삶은 순탄치 않았다. 1944년 만난 첫 남편 이철식씨와의 사이에서 첫딸과 첫아들을 얻었지만 결혼생활은 금방 파탄났다. 1950년에는 동생 옥희씨가 폐병으로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의지할 곳을 찾다 두 번째 남편 김남중씨를 만나 둘째 딸과 둘째 아들을 낳았지만, 그는 가정이 있는 남자였다. 이 시기 개인적 고통이 응축된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이 1951년작 ‘생태’다. 뒤엉켜 있는 여러 마리의 뱀이 사실적으로 그려진 이 작품은 화단에서 천경자를 주목하는 계기가 됐다.

천경자의 생태(1951)는 똬리를 튼 뱀 무리를 그린 것인데, 첫 결혼의 실패와 여동생 옥희의 이른 나이 죽음 등이 겹쳐 한을 표출한 이 그림이 화단에서 천경자를 주목하는 계기가 됐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천경자의 생태(1951)는 똬리를 튼 뱀 무리를 그린 것인데, 첫 결혼의 실패와 여동생 옥희의 이른 나이 죽음 등이 겹쳐 한을 표출한 이 그림이 화단에서 천경자를 주목하는 계기가 됐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어렵게 미술계에 정착했으나 ‘일본색’이라는 꼬리표가 그를 괴롭혔다. 1960년대 한국 문인화가들은 ‘한국적 회화’ 담론을 제시하면서 ‘일본색’의 대표주자로 천경자를 지목했다. 남성 중심의 전근대 질서 하에서 여성인 천경자가 전문 화가가 되는 길은 일본의 채색화를 배우는 것뿐이었는데, 민족주의의 탈을 쓴 화단의 전근대적 정서가 천경자에게 성차별로 작동한 것이다. 천경자는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에서 자신이 1960년대 화단의 민족주의 바람과 성차별적 시선 때문에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서 밀렸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천경자는 자신의 작품으로 알려진 '미인도'를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이 작품이 진품이라는 입장을 고수하자 천경자는 미국으로 떠났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천경자는 자신의 작품으로 알려진 '미인도'를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이 작품이 진품이라는 입장을 고수하자 천경자는 미국으로 떠났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천경자는 자신의 한(恨)을 그림에 쏟아 부었다. 그의 그림은 종이 위에 세필(細筆)로 석채(石彩·돌가루 물감)를 이용해 채색한 것인데, 지금도 동양화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극도의 근대 리얼리즘 회화다. 김종근 미술평론가는 “석채는 색이 오래 남지만 연한 편이라, 천경자의 그림처럼 진한 색을 내려면 70~80번을 발라야 한다”고 그림의 가치를 설명했다. 그는 “조수 한 명 쓰지 않고 모든 그림을 직접 그렸다”며 “무척 성실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작품 하나하나를 분신처럼 아꼈다”고 회고했다.

그런 그에게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과 벌인 ‘미인도’ 진위 공방은 큰 상처였다. 당시 천경자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미인도’가 가짜라고 주장했고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회는 진품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법정에서도 시비가 가려지지 않았고 일각에서 ‘자기 작품도 못 알아보는 작가’라는 말까지 나왔다. 천경자는 끝내 1998년 장녀가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김종근 평론가는 “천경자는 당시 자신이 겪은 일에 치를 떨면서 분노했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완전히 절필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는 ‘이 어려운 난관을 극복해 새로운 차원의 작품을 보여주겠노라’고 적혀 있었다”고 밝혔다.

천경자의 그림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의외로 미술사적인 조명은 부족한 편이다. 신지영 미술사학자는 저서 ‘꽃과 풍경’에서 나혜석과 더불어 그를 “전근대에서 근대로 전환되는 시기에 전문인으로 나선 여성이 전통 질서에 맞부딪치면서 어떤 활동을 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작가”로 평가했다. 김 평론가는 천경자를 “박생광과 더불어 한국 채색화의 원조이자 그림에 자신의 영혼을 건 작가”라 칭송했다. 천경자는‘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속 자신의 모습 그대로, 세상의 시비와 병마에조차 굴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내다 91세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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