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2030 세상보기]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

입력
2015.10.21 14:57
0 0
지난 19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국정교과서 사태에 즈음한 시민사회 시국선언'에서 참석자들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과 민주주의 퇴행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을 선언한다는 뜻에서 '국정교과서'라고 적힌 끈으로 눈을 가리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9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국정교과서 사태에 즈음한 시민사회 시국선언'에서 참석자들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과 민주주의 퇴행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을 선언한다는 뜻에서 '국정교과서'라고 적힌 끈으로 눈을 가리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드디어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우려했던 수백 가지 일 중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하나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 다른 하나는 ‘2030 세상보기’ 코너에 쓸 거리가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둘 다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나는 이 자리를 빌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논란에 한 마디 보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이 지면을 채우기 위해서는 1860자가 필요한데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한다.”라는 문장은 공백과 마침표를 포함해도 18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의 문장을 빌리기로 했다. 마침 지난 20일 젊은 문화계 인사 60여 명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다음은 선언문의 일부를 옮긴 것이다.

“우리는 역사의 본질을 해치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한다. / 올바른 역사는 중립적인 서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고 정확한 역사기술이 가능하다는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다양한 견해와 해석들을 인정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 역사는 어떠한 내용으로도 단일하게 서술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이 진보적인 관점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거부되어야 마땅하다. 올바른 역사임을 스스로 주장함으로써 토론의 가능성이 차단된 역사는 이미 역사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을 잃는다. /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는 역사기술 및 그 교육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우려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요, 객관성을 기한다는 미명하에 단일한 역사기술을 옹호함으로써 역사 그 자체를 위협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같은 선언문에 서명을 했다. 서명을 하는 데에는 18자도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물론 선언문의 내용에 공감했기 때문이기도 한데, 특히 “올바르고 정확한 역사기술이 가능하다는 환상”이라는 문장은 내게 내가 사랑하는 로렌스 스턴의 소설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에 나오는 일화를 떠올리게 했다.

전쟁에서 부상당해 집으로 돌아온 토비 삼촌은 침울하다. 동생을 위해 아버지가 매일 새로운 문병객을 초대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점점 더 곤란해진다. 자신이 어떻게 부상을 당하게 되었는지 끊임없이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자신의 경험을 올바르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말로 전달할 수 없다면 직접 보여주면 될 게 아닌가? 그는 전장을 재현한 일종의 모형을 만들기로 하고 행동에 나선다. 먼저 정확한 지도 제작을 위해 군사 건축학과 포술을 다룬 수많은 책을 섭렵한 그는, 자신에게 부상을 입힌 대포알이 날아온 방향을 계산하기 위해 기하학을 공부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그러는 동안 지식과 함께 그의 아이디어도 다듬어졌다. 마침내 그는 지도와 모형이라는 애초의 생각을 훌쩍 뛰어넘어 시골의 한적한 땅에 실물 그대로의 전장을 만들기로 한다.

물론 이것은 예술과 재현의 문제에 대한 (또 하나의) 알레고리다. 책이란 건 읽어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는 자조적인 농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라고 나는 주장해야겠다). 개인의 역사, 그중에서도 하루의 사건을 다루기 위해 토비는 ‘3년’이라는 시간을 준비해야 했다. 그리하여 토비는 남다른 기억력과 초인적인 의지로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 만들어낸 것에 만족하며 자부심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설령 그가 목표했던 바를 이루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오직 그 자신에게만 ‘올바르고 정확한’ 전달일 것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토비 삼촌에게 미안해진다.

금정연 서평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