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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상해에서 바진을 만나다

입력
2015.10.20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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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중국이다. 상해에 6차례 강연하러 와서 틈틈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조계지를 방문하여 호젓하고 조용한 시간을 누렸다. 물론 중국 입장에서 보면 아편전쟁 이후 외국인들의 강압에 의해 자신들의 영토 일부를 내놓는 수모의 역사의 편린이기도 하지만 2,000만명이 사는 곳에 이처럼 조용하고 넓은 곳을 거의 원형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마치 터널처럼 이어져 가을 햇살조차 지상에 내딛는 게 쉽지 않아 숲에 들어온 느낌이다. 우리처럼 간판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지막지하게 가지를 잘라내고 심지어 밑동까지 잘라내는 야만은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가게들과 예쁜 카페들이 어지럽지 않게 그리고 나대지 않고 음전하게 보석처럼 박혀있는 곳을 걷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난다. 그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바로 바진이었다. 그의 고가였다. 중국의 위대한 문인이었으며 사상가였던 바진이 죽을 때까지 살았던 그의 집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고 집기 등도 그 때 모습 그대로였다. 마침 그 날은 바진이 세상을 떠난 전날이어서 유족들이 모였고 그를 기리는 시민들도 찾아와 헌화하는데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많아서 그가 얼마나 생전에 그리고 사후에 존경 받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바진은 문화혁명 때 반동으로 몰려 가택에 오랫동안 연금되었다. 푸단대학의 자존심이기도 했던 그가 마오쩌둥의 횡포에 동의하지 않았을 때 그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타협하지 않았다. 그가 존경 받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위대한 사상이나 저술보다 그가 보여준 결기와 불의와 거짓에 타협하지 않는 학자와 문인으로서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상해인들의 자부심에 루쉰과 바진의 무대였다는 게 큰 몫을 차지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중국에 올 때마다 사람들의 당당함과 자신감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중국도 초고속성장의 신화가 주춤거리고 G2로서의 자부심에 비례하여 세계에서 그들에게 던지는 의구심과 노골적인 경계심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서두르거나 조바심내지 않는 대국적 면모가 느껴진다. 문화혁명의 야만성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그들로서는 비싼 값을 치른 통과의례였을 것이다. 그 어두운 흔적을 씻기 위해 더 매진하고 미래를 바라보려는 면도 있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실에 대한 답답함이 공존한다. 청년들에게 무작정 패기를 요구할 게 아니라 그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마련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할 때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과거로 무참하게 회귀하고 있다. 최고권력자 한마디에 아무런 절차도 토론도 없이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일에 돌진한다. 미래는커녕 과거로 뒷걸음치는 일에 집권 정당이 앞장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마오쩌둥의 문화혁명 모습과 겹친다.

이 권력이 영원할 것처럼 저렇게 날뛰지만 그 시간이란 것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결국 분열과 증오만 심어놓고 과거로 퇴행한 대가를 미래에 치르게 만들 뿐이다. 이명박정부의 4대강의 졸속과 야만과 탐욕의 속전속결이 빚어낸 결과를 지금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것처럼.

바진을 가택연금하고 홍위병들이 그의 처형을 외쳤지만 끝내 그들의 욕망을 이루지 못한 것은 시민들의 존경심이 더 커서 권력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진의 고가에 찾아온 시민들이 그에 대한 존경과 애틋함을 아직도 보여주는 건 야만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어젯밤 조계지를 천천히 걸으면서 바진이 숨 쉬던 시간을 짚어봤다. 혁명이 끝나자 그는 복권되었다. 야만의 시대는 끝난다. 홍위병도 사라지고 매카시도 죽었지만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준동하는 홍위병과 매카시들을 생각하니 어깨도 발걸음도 무겁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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