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적인 신화와 역사를 품고 그 자체로 완결적 세계를 이룬 판타지 장르를 ‘하이 판타지(High Fantasy)’라 구분한다.
공상이 다른 공상을 낳고 새로운 공상이 또 다른 공상의 터가 되면서 엮인 전체로서의 판타지는 우선 자체의 논리 위에서 안정적이어야 하고, 우리가 참이라 여기는 현실의 어떤 계기에 닿아 적당히 삼투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의 경계를 잃지 않아야 한다. 하이 판타지는 하지만 현실의 세계에 상대적으로 더 무심하다. 닿아 섞이려는 충동보다는 밀어내고 외면하고 아예 잊고 없는 셈 치기도 한다. 인간이 있더라도 우리가 아는 인간이 아니고, 펼쳐진 세계 역시 자연사적 이성으로는 요령부득이다. ‘하이’는 그러니까, 인간적인 것들로부터 띄워 올린 높이로서의 ‘하이’, 상승하는 동안 구축된 낯선 세계와 인물과 가치들의 원리들이 작동하는 시공간으로서의 ‘하이’이다. 그것은 판타지의 순도를 지칭하는 용어라 해도 무방해 보인다. 물론 그 기준은 없다.
영국 작가 존 로널드 루엘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 1892~1973)이 ‘반지의 제왕’으로 구축한 중간계와 제3시대(톨킨 연표 31세기 초ㆍ중반)는 하이판타지와 그 시공간에 대한 준거라 할 만하다. 그는 인류에게 절대반지의 판타지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가 경험한 적 없고 할 수도 없는 거대한 세계와 한 시대, 생경한 언어와 문화와 종족들의 역사를 제공했다. 그의 3부작 ‘반지의 제왕’ 마지막 편 ‘왕의 귀환(The Return of the Kingㆍ사진)’이 60년 전인 1955년 10월 20일 출간됐다.
‘반지의 제왕’이 북유럽 신화, 특히 노르만과 켈트족 신화를 모티프로 쓰여졌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오딘을 비롯한 불사의 신과 요정들의 신화를, 또 아더왕과 가웨인의 전설을 꿰고 있는 이라고 해서 그의 중간계가 친숙할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이야기의 시작 지점인 호빗족 ‘빌보’의 생일 잔치는 톨킨 연표(부록)에 따르면 3001년 9월 22일이지만, 그 연대를 서력 기준으로 31세기라 해도 좋은지 불확실하다. 1,000년 뒤 우리의 후손들이 호빗족과 어울려 지내며 누군가의 생일 잔치에 초대받을 것이란 기대는 아무래도 못 하겠다. 그 세계는 백투더퓨처나 스타워즈의 그것과 다른 우주에 속한다.
다만 선과 악, 권력과 정의, 욕망과 절제의 대립 서사는 그리 낯선 게 아니다. 1,000년 전이나 후나 현실과 별로 다르지 않으리라는, 지독한 서사의 장악력을 저 아득한 하이 판타지도 벗어나지 못했다. ‘왕의 귀환’이라는 3부의 제목이 암시하듯, 낯섦과 새로움은 인간의 망각에 연유하는 것인지 모른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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