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0월 19일 서울대 법대 교수 최종길(사진)이 변사체로 발견됐다. 서울 중구 남산 옛 중앙정보부에 ‘유럽 간첩단 사건 수사 협조’를 위해 자진 출두한 지 사흘 만이었다. 중정은 25일 “(그가) 간첩조직망에 대한 여죄를 조사받던 중 용변을 보겠다며 7층 화장실에 들어가 창문으로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DJ 납치사건 두 달여 뒤였고, 대학가의 유신 반대 시위가 한창이던 때였다. 10월 4일 교수회의서 그는 서울대 법대생들이 데모를 하다 체포ㆍ구금된 일을 두고 정부와 대학 당국을 성토하며 “대학 총장이 부당한 공권력의 최고 수장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항의하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서독 쾰른대에서 민법과 국제사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아 1965년 서울대 교수가 됐고, 72년 정교수로 승진했다.
그의 사인이 고문에 의한 타살로 확인된 것은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를 통해서였다. 중정이 투신 자살 근거로 들었던 간첩 자백도, 담당 수사관의 목격담도, 화장실 소변기에서 발견됐다는 발자국도, 부검 감정서도 모두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앞서 1988년 그의 동생 최종선의 양심선언이 있었다. 최종길이 고문사 당하던 무렵 중정 감찰실 직원이든 최종선은 고문치사 사건이 간첩 투신자살 사건으로 변질된 과정 등을 74년 수기 형식으로 기록했다. 내용 중에는 ‘형의 명예라도 회복시켜 달라’는 자신의 요구에 중정이 거꾸로 탄원서를 쓰게 한 사실도 있었다. “존경하는 중앙정보부장님, 비록 조국을 배반하고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결국은 자기의 생명을 끊은 최종길이 밉고 원망스러우나(…) 그 죄상이 신문에 보도되지 않고(…)”(‘산 자여 말하라’2001, 공동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최종길 사건 공소시효 만료일 직전인 88년 10월 그의 수기 등을 공개하며 재수사를 요구했으나 검찰은 묵살했다.
2006년 최종길 교수 유족의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대법원은 “국가 권력이 나서서 서류를 조작하는 등의 방법으로 조직적으로 사실을 은폐하고 고문 피해자를 오히려 국가에 대한 범죄자로 만든 사건에서 국가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며 18억6,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그 해 ‘윤필용 사건’(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의 “각하의 후계자는 이후락이다”발언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던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DJ 납치 실패와 최종길 고문치사 직후인 73년 12월 해임됐다. 이후락은 78년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돼 공화당에 입당하지만 10.26 직후 신군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계에서 쫓겨났다. 2009년 85세로 사망. 당시 차장 이상익은 민주정의당 제11,12대 민주정의당 의원을 지내고 2006년 78세로 사망.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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