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상봉 1차 393명 오늘 속초 집결
2박3일간 12시간 '꿈같은 재회'
"늙어버린 얼굴 못 알아보면 어쩌나
돌 지나 헤어져 한번도 못 본 아버지
죽은 줄 알았던 누이가 살아있다니
파킨슨병 앓지만 기어서라도…"
경북 문경에 사는 이옥연(87) 할머니는 요 며칠 장롱 깊은 곳에 숨겨 놓은 결혼 사진을 꺼내 보느라 좀체 잠을 이루지 못했다. 1950년 전쟁 통에 생이별을 한 지 65년 만에 북한에 사는 남편 채훈식(88)씨를 만날 날이 코 앞으로 다가 왔기 때문이다. 허리도 굽고 백발이 성성해진 이 할머니는 자신처럼 늙어버린 남편의 얼굴을 혹시나 못 알아볼 까봐 빛 바랜 흑백 사진 속 앳된 신랑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남편이 갑자기 사라졌을 당시 돌이 갓 지났던 아들 채희양(66)씨는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한 평생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게 돼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 혹한 상봉 이후 1년 8개월 만에 성사된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20일부터 일주일간 시작된다. 북측 상봉 신청자들이 남측 가족을 만나는 1차(20~22일)와 남측 상봉 신청자들이 북측 가족을 만나는 2차(24~26일)로 나눠지는 상봉행사를 통해 190여 가족들이 혈육의 정을 나누게 된다. 1차 행사에 참가하는 남측의 96가족(393명)은 19일부터 강원 속초에 집결해 신원확인과 방북교육, 건강검진 등 최종 점검으로 하룻밤을 보낸 뒤 20일 강원 고성의 동해선 남북출입사무소에서 버스를 타고 금강산으로 향하게 된다. 기간은 2박 3일이지만 상봉행사는 총 6차례, 12시간 동안의 만남이 고작이다.
65년 만에 혈육을 만나는 가족들은 저마다 애끓는 사연을 품고 있지만 평생을 사무친 그리움의 심정은 똑 같았다. 이 할머니는 남편이 언젠가는 살아 돌아올 것이란 생각에, 남편이 지어준 집터를 떠나지 않고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돌보며 재가도 하지 않고 한 평생 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왔다고 한다. 아들은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놋그릇과 신발, 책 등을 여전히 고이 간직하고 있다. 채희양씨는 “올해 처음으로 수확한 햅쌀을 가져다가 아버지에게 따뜻한 밥 한 공기 대접해드릴 생각이다”고 말했다.
이번 이산가족 상봉자 가운데 남북 통틀어 최고령으로 황해도 장연군 출신인 구상연(98) 할아버지는 1950년 9월 탄광 일을 하러 집을 떠났다가 그 길로 두 딸과 헤어졌다. 당시 7세, 4세로 “아빠, (갔다가) 또 와”라고 세 번이나 소리치던 송자ㆍ선옥 자매는 이제 71세, 68세의 할머니가 됐지만, 구 할아버지는 딸들에게 주려고 빨간색의 꽃신도 준비했다.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를 탈 정도로 쇠약해진 구 할아버지는 “이번에 만나서 딸들에게 괜히 안 좋은 건 아닌지….”라고 말을 잇지 못하며 온통 딸 걱정에 여념이 없었다.
북측의 친누나 박룡순(85)씨를 만나게 되는 박용득(80) 할아버지는 “서울이 수복된 이후 서울대병원 간호사로 일하던 누나가 쌀을 구하러 병원에 다녀온다고 나간 게 마지막 모습이었다”며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만나면 제일 먼저 ‘살아 있어 고마워’라고 말할 것 같다”고 울먹였다. 북측의 형님 지형탁(84)씨를 만나러 가는 지종탁(76)씨는 오래 전부터 파킨슨병을 앓아 대화를 나누는 것 조차 힘겨워 하면서도 “생전에 어머님은 형님을 찾기 위해 한 평생 울고만 다니셨는데 돌아가신 어머님의 한을 나라도 풀어줘야 하지 않겠냐”며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서라도 가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1차 상봉을 하루 앞두고 남측의 가족들은 북한의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미리미리 준비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치약 칫솔 속옷 양말 등 생활필수품과 각종 의약품이다. 북한에 전기가 부족하다고 해서 랜턴을 챙겨가겠다는 상봉자도 있다.
어렵게 성사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지만 어두운 그림자도 없지 않다. 이산가족 1세대의 고령화로 인해 이번에 상봉하는 190여 가족 중에 부모나 자식 등 직계가족을 만나는 비율은 10%에도 못 미치는 등 갈수록 상봉 행사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한적십자사 관계자는 “이미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부모 자식 형제 간 직접적인 이산가족 상봉은 시한을 다한 것 같다”며 “보통 조카들로부터 생전의 가족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전해 듣는 게 다반사”라고 말했다. 이번 1차 상봉 가족 중에도 건강 악화를 이유로 상봉을 직전에 포기한 안타까운 사례가 나오기도 했다. 고향이 평남 안주로 북측의 두 여동생을 만난다는 안윤준(86) 할아버지는 “피붙이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좋다가도 또 언제 볼지 기약할 수 없으니 슬프다”며 “(일회성 상봉이 아닌) 이산가족이 서로 연락하고 지낼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윤주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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