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현대 등 대기업 가족사를 보면 창업주가 생존했을 당시와 그 이후는 확연히 구분된다. 사전 계열 분리가 되지 않은 경우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결국 기업 분리로 이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창업주가 생존해 있으면 아버지의 존재 하나 만으로 자식들 간의 규율과 질서가 유지되지만 그 이후는 달라지는 게 다반사다.
그런데 롯데그룹은 예외인 듯싶다. 큰 아들은 일본, 작은 아들은 한국에서 경영을 총괄해오다 최근 그 선이 무너지면서 연로한 아버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존재감은 상실의 시대를 맞고 있다. 6월 말 시작된 롯데가 분쟁의 원인을 보면 결국 신격호 회장의 과욕 탓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60세를 넘긴 두 아들의 역할 분담을 제대로 해주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움켜쥐고 가려던 왕 회장의 욕심이 형제 간 분란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3개월이 흐른 지난 주말 신격호 회장이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신 총괄회장은 “롯데그룹은 후계자가 누가 되는 거 그런 것이 조금 문제가 시끄럽지만, 그건 간단한 문제”라며 “한국 풍습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지만 장남이 후계자라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후계자가 누가 되는 것은 (지금 얘기할 단계가 아니다)…”라며 “나는 아직 10년, 20년 일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이 아직 건재하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던 듯하다. 두 아들이 다투는 모습을 보며 그룹 보스이자 아버지로서, 이들을 화해시켜 한일 롯데가 영원히 한 몸체로 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자신이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후계자는 장남이 될 것이다(아직은 내가 총수이다)”며 “그걸 반발해 자신(신동빈 회장)이 후계자가 되겠다고 하다 보니 시끄럽게 됐고 그건 아니다”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물론 신동빈 회장 측은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 “신 총괄회장에게 소상히 맥락을 보고하고 그때 가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즉답을 유보했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면 신 총괄 회장의 답변도 달라질 것이라는 얘기다. 물론 누가 봐도 신동빈 회장이 신동주 전 부회장보다 한국롯데 최고경영자로서 더 적합한 인물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신 전 부회장 스스로도 그렇게 판단한다. 이사회와 주총을 거쳐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신 회장이 실질적으로 경영권을 쥐고 있고, 이미 재산 증여가 마무리된 상황에서 신 총괄회장의 발언이 현재의 상황을 바꿔놓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신격호 회장 입장에선 다를 수 있다. 주변 정황을 종합해 보면 아들에 의해 한일 롯데그룹의 지주회사인 롯데홀딩스 대표이사직에서 쫓겨난 배신감이 커 보이는 게 사실이다. 가족들에게 “둘째 아들에게 재산을 찬탈 당했다”고까지 말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또 자신의 해임에 동조한 종업원ㆍ임원지주회에 대한 굴욕감과 배신감도 상당할 것이다. 특히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판단력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취급은 매일 아침마다 신문을 읽는 그로선 울화가 치밀 것이다. 실제 매주 2,3번씩 계열사 보고를 받고 월드타워 공사 현장을 휠체어를 타고 돌아볼 정도의 기력과 또렷한 의사 전달, 판단력을 가진 그의 존재를 폄하하는 건 도의적으로도 옳지 않다.
그럼에도 신격호 회장은 ‘신동빈 회장이 사죄하면 용서해 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건 당연히 용서해야지, 아무 것도 아닌데 일이 크게 됐다”고 했다. 투자 실패의 책임을 물어 롯데홀딩스 회장직에서 해임한 큰 아들이 석고대죄하자 금세 용서했듯이, 작은 아들 역시 용서를 구한다면 아버지로서 당연히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동빈 회장은 신격호 회장의 진정성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물론 신격호 회장의 언급이 현 경영권 구도를 바꿀 만큼 실질적인 영향을 주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그의 존재감이 있으니 롯데그룹이 이 정도나마 유지되는 게 아닐까. 국내에서 35만명을 직ㆍ간접 고용하는 거대기업 롯데가 또 다시 가족 문제로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이번 분쟁이 내부 시스템을 정비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그게 신격호 회장의 진심일 것이다.
장학만 산업부 선임기자 trendno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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