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美 민주당 후보토론회 모습
힐러리 향해 네가티브 거부한 샌더스
한국 대선에서도 이런 모습 가능할까
현지시간으로 13일 저녁 열렸던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첫 TV토론회의 한 장면은 몇 번을 돌려봐도 인상적이다. 초반 돌풍의 주역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발언을 담은 약 1분 분량의 이 동영상은 토론회 최고 하이라이트로 부각되며 SNS에서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다. 내용은 이렇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이메일 스캔들 얘기가 나오자 샌더스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다.
“미국인들은 그 빌어먹을 이메일(damn email) 얘기를 듣느라 신물이 나요. 지금 미국은 중산층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2,700만 국민들이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산과 소득의 불평등에다 대외무역정책으로 인해 수백 만개의 좋은 일자리가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이 나라가 대체 민주주의로 가는지, 과두정치로 가는지 궁금해합니다. 이메일 얘기는 충분히 했어요. 이제 미국이 직면한 진짜 이슈들을 애기합시다.”
샌더스의 예상 못한 발언에 힐러리는 감사의 악수를 청했고, 청중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국무장관 재직 시절 연방규정을 어기고 개인계정으로 수만건 이메일을 주고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힐러리는 곤욕을 치렀다. 이메일 전문이 모두 공개됐고 딱히 발목 잡을 만한 대목은 없었지만, 선거국면에선 원래 별 문제가 아닌 것도 문제를 삼으면 다 문제가 되는 법. 경쟁진영으로선 이메일 스캔들이 사상 첫 여성대통령에 대한 기대감, 퍼스트레이디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거친 더 이상 화려할 수 없는 커리어, 거기에 본선 경쟁력까지 갖춘 힐러리를 흠질 낼 수 있는 유일한 재료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샌더스는 이 ‘호재’를 발로 차면서, 대신 정책을 토론하자고 했다.
쫓기는 입장도 아니고 쫓는 입장에서 이 무슨 자신감인지. 하지만 샌더스의 ‘쿨함’은 큰 찬사를 받았다. 토론 중 실시간으로 진행된 온라인 여론조사에선 샌더스에게 70%에 육박하는 압도적 지지가 쏟아지기도 했다.
반면 공화당 진영에선 욕설에 가까울 정도의 비판을 퍼붓고 있다. 공화당 대선 선두주자인 도널드 트럼프는 힐러리에게 면죄부를 준 샌더스를 향해 ‘미치광이’라고 독설을 퍼부었고, 또 다른 대선후보인 마크 허커비는 ‘내 세금을 샌더스에게 맡기는 건 내 개를 북한요리사에게 맡기는 것과 같다’는 글을 올렸다.
샌더스의 신사다움 때문일 수도 있겠고, 반대로 신사다움에도 불구하고 일 수도 있겠지만, 정치전문가와 미디어들도 토론회 종합 결과에선 힐러리의 손을 들어줬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토론회 승자가 힐러리였다고 공식 선언했고, 많은 분석가들도 샌더스에 대해 ‘한 방이 없었다’ ‘미국을 맡기기엔 뭔가 약해 보인다’는 평을 내놓았다. 힐러리의 이메일 아킬레스건을 물고 늘어졌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는지.
대선전이 공식화되는 내년 2월 아이오와 코커스와 뉴햄프셔 프라이머리까지 이제 100일 정도 남았다. 민주당 대선후보는 결국 힐러리가 될 것이다. 74세의 샌더스는 기성 정치인에게선 찾을 수 없는 신선함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지지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와 유색인종 표심을 얻는 데 한계가 명백해 보인다. 아마 그 자신도 민주당 대선후보는 자신의 자리가 아님을 알 것이다.
선거의 목적은 승리지만, 승패를 떠나 메시지 전달을 위해 선거를 뛰는 사람도 있다. 선거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무엇인지, 자신이 속한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릴 수 있다면 족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그나마 선거는 최소한의 진지함이 유지되는 것이다. 샌더스가 바로 그런 범주가 아닐까 싶다.
내년부터 우리나라도 선거시즌에 돌입한다. 4월 총선이 끝나면 곧바로 거친 대권레이스가 시작될 것이다. 과연 쿨한 선거전, 네가티브 없는 비전대결이 가능할 까. 말꼬리잡고 흠집 내고, 그러다 정작 정책과 철학으로 들어가면 영혼 없는 암기형 질의응답만 반복하는 토론은 더 이상 없길 바란다. 지식과 비전으로 유권자를 흥분시키고 감동시키는 그런 후보, 그런 토론을 보고 싶다.
이성철 부국장 sc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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