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지점서 10m 떨어진 환풍구엔 '추락위험' 표지판만 덩그러니
전국 환풍구 2000곳 안전에 문제점… 도로와 환풍구 구별 되지 않는 곳도
불량 상태 가장 많은 경기 지역 "예산 문제 등으로 보수 쉽지 않아"
“저기가 작년에 사람들이 떨어졌던 곳인데….”
15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 판교테크노밸리의 유스페이스 야외 광장을 지나던 한 시민이 가리킨 곳에는 철제 안전펜스로 사방을 막고 ‘접근금지’ 푯말이 붙어 있는 환풍구가 있었다. 삭막한 외양을 가리기 위해 펜스에 화분을 여러 개 걸어 놓았지만 사고의 흔적을 지우기엔 역부족으로 보였다. 이 환풍구는 지난해 10월 17일 오후 5시53분, 걸그룹 공연을 구경하기 위해 몰렸던 사람들이 덮개가 무너지면서 약 20m 아래 지하 주차장으로 추락해 16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친 사고가 발생했던 곳이다.
판교 환풍구 참사 1년이 지난 현재 거리 환풍구 안전에 대한 시민의 불안은 여전하다. 실제로 사고 이후 여러 제도개선이 이뤄졌지만 안전 조치를 불이행하고 있는 환풍구도 100곳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날 판교 사고 지점에서 1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 환풍구에는 안전장치 없이 접근금지 이정표만 놓여 있었다. 주민 전모(44ㆍ여)씨는 “아이들이 제지 받지 않고 환풍구 쪽으로 다가가 엄마들이 ‘위험하다’며 막는 경우를 종종 봤다”고 말했다. 분당구 야탑동의 성남종합버스터미널 주변 환풍구도 ‘추락위험’ 표지만 있을 뿐 접근을 막는 시설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택시에서 내려 터미널로 이동하던 시민들이 무심결에 환풍구 위에 올라섰다가 20여m 깊이의 아래를 내려다본 후 움찔해 인도로 옮겨 가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서울 지하철 명동역 9번 출구 뒤편 인도 위의 환풍구는 아예 도로와 구별이 되지 않았다. 환풍구 한 가운데 주황색 플라스틱 쓰레기통이 놓여 있고 위로 오토바이 2대가 주차돼 있었다. 역에서 나온 20여명의 중국인 관광객들은 무리를 지어 한꺼번에 환풍구를 밟고 지나가기도 했다. 회사원 김모(32)씨는 “여기저기 쌓아놓은 적재물로 길이 좁아 환풍구로 다닐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이찬열 의원이 국토교통부로부터 받은 ‘판교 사건 이후 환기구 안전점검 실시현황’을 보면 판교 추락사고 후 실시한 안전점검 결과 전국 3만5,034개의 환풍구 중 6%가량인 2,074곳에서 문제점이 드러났다.
사고 당시 환풍구에 대한 명확한 설비기준이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국토부는 지난해 11월 환기구 설계ㆍ시공ㆍ유지관리에 관한 기준 지침을 만들어 지방자치단체에 내려 보냈다. 지침은 환풍구도 건축물의 일부로 보고 ‘활하중(구조물 자체의 고정 하중 외에 사람이나 물건 등을 올려 놓을 때 생기는 하중)’의 최소 기준을 적용토록 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 건물주는 환풍구 위쪽으로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주변에 관목이나 조경수를 심고, 환풍구 높이를 2m 이상으로 설치해야 한다. 서울시도 자체적으로 연구용역을 실시한 뒤 지난달 ‘공공시설 환기구 설치 및 관리기준’을 마련했다.
국토부가 이런 기준에 근거해 구조물의 파손이나 균열 등 부적정한 환풍구들에 대한 조치를 실시한 결과, 9월 30일 기준으로 불량 상태인 환풍구는 아직도 140곳이나 된다. 특히 경기 지역이 111곳으로 가장 많았다. 경기도 관계자는 “조치를 촉구하고 있지만 예산 문제도 있고 건물주에게 연락이 닿지 않거나 상인들의 이해관계가 상충해 신속한 보수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시민들은 당국의 조치에도 여전히 불안하다는 반응이다. 판교테크노밸리 인근 회사에 근무하는 신모(33)씨는 “무게를 견딜 수 있게 보강했다고 하나 만의 하나를 생각해 가능한 한 환풍구 위를 지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김근영 강남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환풍구 설계 단계에서부터 조형물 등의 설치로 접근성이 떨어지게 하고 평소에도 환풍구에 접근하지 않도록 안전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성남=안아람기자 oneshot@hankookilbo.com
정지용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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