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인환은 ‘사랑은 가고/ 옛날(과거)은 남는 것’이라 했다. 세월이 흘러 사랑도 덧없이 스러졌을 때, ‘서늘한 가슴에’ 남는 ‘옛날’을 시인은 ‘그 눈동자 입술’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그것도 살았을 때 얘기지, 나중엔 사랑도 그저 유물로만 남는 것인지 모른다. 김환기 화백의 부인 김향안(1916~2004) 여사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자작나무에 새긴 이름’이 생각난다.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자작나무의 ‘하얀 피부’에 새겨 유물로 남긴 옛 러시아 한인 여인의 아련한 얘기였던가….
▦ 1998년 발굴된 ‘원이 엄마의 한글편지’도 옛사랑의 애틋한 유물이다. 경북 안동 고성 이씨 문중 며느리였던 원이 엄마는 1586년 남편 이응태가 서른 한 살로 요절하자, 제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 한 짝과 편지를 적어 고인의 관에 합장했다.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보여 주세요…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 저녁노을 ‘하’자에, 치마 ‘피’자를 쓴 ‘하피첩(霞?帖)’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유물이다.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 중이던 1807년, 경기 양수리 자택에 남아 병색이 깊어진 부인 홍씨가 31년 전 시집 올 때 입었던 다홍치마 다섯 폭을 선생께 보냈다. 낡고 해진 신혼 치마를 보낸 부인의 마음을 어떤 이는 ‘병세를 감안한 영원한 이별의 정표’라고 했고, 다른 이는 ‘나를 잊지 말라’는 뜻이라고도 했다. 어쨌든 선생이 부인의 치마를 작게 재단해 거기에 두 아들에게 삶의 지침이 되는 글을 써서 남긴 게 하피첩이다.
▦ 정씨 문중에서 보관해 오던 하피첩은 6ㆍ25 전쟁 중에 수원역에서 분실됐다가 2004년 파지 수집 할머니의 수레에서 4첩 중 3첩이 발견돼 세상에 다시 나왔다. 2006년 TV ‘진품명품’에 등장해 1억 원의 감정가를 받았지만, 지난 9월 서울옥션 고서경매에 나왔을 땐 국립민속박물관이 7억5,000만원에 응찰해 낙찰 받았다. 지난 13일 박물관이 그 하피첩 3첩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했다. 보존 처리 후 내년 2월에 특별전시회를 연다니, 선인의 아름다운 마음을 대할 기대가 크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