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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가을 운동회와 국민체조

입력
2015.10.1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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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 초등학교에서는 가을 운동회가 열리고 있다. 좁은 운동장에 학생 수가 많으니 학년별로 나누어 운동회를 하는 것이 수십 년 전 내가 경험했던 시골 초등학교 운동회와 다를 뿐 전체적인 풍경은 달라진 게 별로 없는 듯하다. 요즘은 주유소에서나 볼 수 있는, 조잡한 만국기를 운동장에 내거는 것부터 그렇다. 개인별 달리기, 장애물 달리기도 많이 본 풍경이고 집단 체조를 하는 것도 예와 다르지 않다. 이어 달리기로 운동회의 막판을 장식하는 것도 비슷하다. 심지어 어린이들이 군에서 제식 훈련할 때 연습하는 좌향좌, 우향우로 방향을 바꾸는 것도 40여 년 전과 같다.

무엇보다 익숙한 것은 운동회 시작 즈음에 들리는 국민체조 음악이다. 1970년대 후반 이후 학교를 다닌 사람은 누구나 익히 들어온 추억의 음악이다. 검색해 보니 국민체조는 1977년 3월부터 각 기관, 특히 학교에 집중적으로 보급되었다. 웬만한 군인의 구령보다 더 박력 넘치는 구령이 궁금해 찾아보니 모 사립대 교수가 붙인 것으로 되어있다. 그 시절에는 대학교수 목소리도 군인을 닮았던 모양이다. 최근 들어 학교에서는 새천년 건강체조가 보급되고 있으나 아직도 일부 중고교에서는 수행평가에 국민체조를 넣고 성적에 반영한단다. 어쨌거나 인터넷에 글을 올린 사람 대부분은 이것이 국민 건강 향상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이렇게 호의적인 평가가 많은 추억의 체조가 유독 내게 고통스럽게 기억되는 것은 학생군사훈련, 즉 교련이나 군대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열병을 위한 제식훈련이 떠오르는 것이다. 군에서 제식훈련만큼 힘들고 지루한 훈련도 흔하지 않다. 돌아보면 제식훈련은 군에서나 1970, 80년대 초반까지 교련 시간에만 배운 것이 아니다. 내 기억으로 1970년대 초반 중학교 체육 수업은 차렷과 열중쉬어, 거수경례 배우기로 시작되었다. 행진곡에 발맞춰 줄지어 행진하는 것은 이미 초등학교 시절 익숙해졌다.

국민체조 음악을 들으며 교련이나 군사훈련을 받을 때를 떠올리는 게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운동회의 탄생 자체가 일제의 군사주의 태동과 맥을 같이하는 까닭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시작된 운동회는 축제의 장이라기보다 신체의 규격화를 통해 근대 국가가 요구하는 국민을 만들어내는 교육의 장이었다. 운동회는 일제가 근대를 구축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집단 광기의 산물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지금도 행해지는 집단 체조는 변형된 제식훈련에 다름 아니다. 운동회 하면 떠올리는 달리기나 2인 삼각경기도 일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요컨대 청군, 백군이 경쟁하는 추억의 운동회는 일제하에서 이식된 군사 문화의 잔재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국민체조가 유신 독재의 폭압이 절정일 무렵 보급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5ㆍ16 군사 쿠데타가 성공한 뒤 군사 정권이 가장 먼저 보급한 것 중의 하나가 재건체조 아닌가. 재건체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군사훈련을 받았던 만주국의 건국체조를 본 땄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가 흉내 낸 것은 국민체조 뿐 아니다. 황국신민서사를 모방해 국기에 대한 맹세를 만들고, 교육칙어를 전범으로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었다. 이렇게 교련을 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며 자란 세대가 민주화의 주역이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끝내 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할 모양이다. 결과가 어떨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순 없지만 결국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 그런데 어쩌나, 아집과 독단에 사로잡힌 권력자가 한사코 되돌려대는 역사의 시계로, 다시 40년 전 후진 독재 국가의 국민이 되어가는 이 모멸감을.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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