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책임은 부정하고 불행 이유 외부요인 탓 풍조
소득·계층·지능·외모 등 물질적 요소는 진정한 행복과 거리
분노 표출보다 감정 승화 '긍정적 방어기제' 터득해야
현대경제연구원이 지난 8월 국내 성인 남녀 81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20~30대 청년 5중 4명은 “노력해도 계층상승이 힘들다”고 답했다. 이런 조사 결과는 대한민국이 지옥에 가깝고 희망 없는 사회라는 뜻의 ‘헬조선’과 현대적 골품제라 할 ‘수저계급론’의 독설과 자조와 비아냥이 세인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는 현 세태를 반영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이 지독한 아픔과 중병 상태에 단단히 빠져 들어 있다. 불행을 말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행복 찾기는 정녕 도달할 수 없는 꿈인 것인가.
사회학자들은 불행을 말하는 사람들 표정에서 도리어 행복에의 갈망을 읽는다. 수저계급 운운하며 집단적 비관증의 늪에 빠진 대중 심리의 밑바닥에는 행복을 열망하는 반대 심리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헬조선, 수저계급 등 말이 난무하는 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폭력적으로 변화한 결과”라고 현 상태를 진단한다. 신 교수는 “개인들이 생존을 해결해야 하는 위험ㆍ불안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행복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일지 모른다”고 전제한 뒤, “사회가 불안해질수록 구성원들이 협력해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데 우리사회 구성원들은 공격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했다. 집단적으로, 공격적인 방식으로 불행을 말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불행하다는 방증이며, 이는 그만큼 사람들이 행복을 바라고 있음을 나타내는 반증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세인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른바 수저계급은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똥수저로 분류된다. “금수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야 현재는 물론 미래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다”, “동수저는 몰라도 흙수저와 똥수저를 물고 나오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돌고 있다. 헬조선이란 독한 신조어가 등장한 것도,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로 출생 신분을 나누는 풍조도 이를 뒤집으면 그만큼 행복해지고 싶다는 열망과 욕구의 반영이라는 해석이다.
현대적 골품제라 할만한 ‘수저계급론’은 일종의 긍정심리학의 ‘행복의 기준점(happiness set point)’ 이론에 기대는 의존적 심리다. 수저계급론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유전자가 행복을 좌우한다는 이 이론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을 결정짓는 요소 중 유전의 영향력은 50%에 이른다. 이어 외부 환경요인이라 할 수 있는 ‘삶의 상황’은 10%, 유전과 외부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인간이 의지적으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의지적 활동’이 40%를 각각 차지한다. 금수저를 물고 나오면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흙수저를 물고 나온 인간보다 높을 수밖에 없는 셈이다.
흙수저 물고 나오면 무조건 불행할까?
흙수저를 물고 나온 사람들은 행복할 수 없을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순 없지만 행복이 대물림 된다는 고정관념은 잘못으로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부모가 이혼을 했으니 자신도 이혼을 할 것이고, 부모가 우울하니 본인도 우울할 것이라는 식의 ‘유전자 결정론’은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를 병들게 만든다는 지적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자가 좋지 않아 나는 평생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포자기나 체념도 폐기 대상이다.
현실은 딴판이다. ▦모든 상황을 부모 탓으로 돌리는 태도 ▦잘못된 교육정책으로 자신과 자녀가 실패했다는 태도 ▦모든 문제를 사회 탓으로 돌리고 자신의 책임지지 않으려는 무기력한 태도 등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팽배하다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진단한다.
이나미 박사(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 원장)는 자신의 책임은 부정하고 불행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는 우리시대의 민낯을 꼬집는다. 이 박사는 “기업이나 사회의 책임은 지적하지 않고 개인의 정신에 무한책임을 돌리는 긍정심리학은 위험하다”며 “자아의 책임과 의지는 부정한 채 환경 탓만 하는 태도는 건강하지 못하다”고 했다. 의지의 힘을 부정한 채 매사 환경을 탓하는 사람은 무기력해지거나, 아프거나, 미칠 수밖에 없다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우려한다.
긍정심리학에서 제시한 ‘행복의 기준점’을 새로운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한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행복드림의원 원장ㆍ영화 심리슈퍼바이저)는 “행복의 기준점 이론은 유전적 요소가 행복을 50% 정도 좌우한다고 보고 있지만 이와 함께 삶의 상황(10%)과 인간의 의지적 활동(40%)도 행복에 이르는 중요한 요인으로 바라보고 있다”면서 “인간의 의지적 활동으로 유전적 요소를 희석시키고 얼마든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고 했다. 김 전문의는 “우리 주위에는 좋은 부모의 유전자를 받고도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도 많다”며 이같이 밝혔다.
“고소득ㆍ외모는 행복의 절대적 기준 아냐”
헬조선, 수저계급 등으로 대변되는 집단적 비관 상태를 불식시키고, 우리사회 구성원들이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행복에 대한 인식이 개선돼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흔히 행복의 조건으로 고소득 고학력 결혼 건강 등을 꼽는다. 돈 많고 건강하고 결혼생활에 만족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도 말한다. 우리 사회 대다수는 이 목표를 위해 죽을힘을 다하고 있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34개 회원국 중 29위로 최하위권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고소득 고학력 결혼 건강 등 우리가 행복의 조건이라 여기고 있는 물질적 요소들은 사실 행복과 낮은 상관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또 지능 수준과 신체 매력도도 마찬가지다. 김한규 전문의는 “소득 계층 지능 신체매력도 결혼 등 우리가 알고 있는 행복과 관련된 요인들은 진정한 행복과는 거리가 있다”면서 “직업만족도 낙관성 자존심 긍정감정의 경험빈도 감사 경험 성(性)적 활동 빈도 등 정신적 요소가 행복을 좌우한다”고 했다. 경제적 여유로움이 생기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지만 물질적 풍요가 곧 행복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OECD 행복지수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는 소득과 자산, 직업과 소득, 주거 등을 평가하는 물질적 삶 측정영역에서는 36개 조사국 중 20위를 기록했지만 건강상태, 일과 삶의 조화, 교육과 기술, 사회적 관계 등 삶의 질 측정영역에서는 29위를 기록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이같은 행복지수 결과에 대해 “국가 사회 개인 공히 물질적 욕구만 충족시키면 행복하고 잘사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김 전문의는 “소득 수준이 최소한의 인격을 유지할 수 없으면 행복과 상관성이 높게 나타나지만, 가난을 벗어나 의식주와 질병치료 등 기본욕구가 충족되면 수입이나 재산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고 말했다. 심리학자들도 “인간은 신체적, 경제적으로 보상을 받아도 행복감을 오래 느끼지 못 한다”고 말한다. 이른바 ‘쾌락적응(hedonic adaptation)’으로 인해 물질적 보상으로 인한 행복감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원래 감정 상태로 돌아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프고 미치겠는‘나’를 바꾸는 힘‘긍정’
행복을 원한다면 부정보다 ‘긍정의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를 터득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최수희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리사회 구성원들은 자기에게 피해가 발생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분노를 표출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하다”면서 “분노를 표출하는 것보다 행동을 억제하고 감정을 승화하는 성숙한 방어기제를 사용하면 행복에 한층 다가 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최 교수는 이어 “자신이 어떤 방어기제를 사용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게 문제”라면서 “자신의 입장과 처지를 냉철하게 뒤 돌아보는 연습을 통해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인식하게 되면 삶의 방향이 바뀔 수 있다”고 했다.
사회학자들은 ‘긍정적 방어기제’를 ‘긍정적 선택’으로 바꿔 말한다. 성경륭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현재는 물론 미래를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소득 건강 관계 공동체 등 기본조건과 함께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긍정적인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아무리 악조건이라도 마지막 선택에서 부정보다 긍정을 선택하는 이들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나미 박사는 “외부뿐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모순과 부조리와 약함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고, 도전한다면 현재 아프고 미치겠는 나를 새롭고 건강한 나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 박사는 “자신뿐 아니라 사회를 바꾸는 과정은 반드시 고통이 수반되는데 현재 우리사회 구성원들은 고통과 아픔 없이 행복을 얻으려 한다”면서 “정의롭지 않은 사회에서 잘못된 사회의 희생자이기 때문에 ‘헬조선’을 외치면서 육아도, 취직도, 모두 포기하고 아프고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 말고, 성가시고 불편하더라도 자신의 콤플렉스를 바라보는 진지한 내적 작업을 통해 성장과 발전,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과거와 달리 개인적 행복만을 추구하는 ‘고립된 행복’을 탈피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박한선 성안드레아 신경정신병원 과장은 “행복이 가장 중요한 삶의 척도로 작용하면서 일종의 자격이나 가치와 비슷한 의미를 갖게 됐다”면서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등으로 신분을 나누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인데, 경외감 공경심 동정심 이타심 배려심 등 인간 고유의 가치와 관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김치중 의학전문기자 cj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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