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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생활 무얼 얻었나 덧없는 고민… 고구마밭에 퍼질러 앉는 순간 '훌훌'

입력
2015.10.09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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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공기에 부지런해진 마음… 이틀째 매달린 고구마 캐기

못난 생김새 이리저리 돌려보는데 "주인 닮았다" 한마디에 기분 묘해

라디오에서 나오는 가을 타령

귀농 5년차 수확 따져 보니 자연과 꾸밈 없는 삶 으쓱하지만

통풍과 농사일로 쑤시는 허리 기숙사로 보낸 아들 떠올라 헛헛

누구는 단순하게 사니 힘들다 하고 누구는 단순해서 좋다며 부러워해

아리송한 마음, 하늘 보며 달래지

고구마를 캐고 일어나 뒤를 돌아보니 조금씩 움직인 엉덩이 자국이 고랑 위에 길을 만들었다. 길 왼쪽이 고구마, 오른쪽이 생강과 울금이다.
고구마를 캐고 일어나 뒤를 돌아보니 조금씩 움직인 엉덩이 자국이 고랑 위에 길을 만들었다. 길 왼쪽이 고구마, 오른쪽이 생강과 울금이다.

오토바이 핸들을 잡은 손등에 날것으로 부딪히는 공기가 아프다. 길가 벚나무 이파리는 달린 것보다 깔린 것이 더 많아 보인다. 꽃 비 쏟아내며 마음 홀렸던 게 언제라고 벌써 겨울 채비를 하는 모양이다. 장갑이라도 준비해야지 했던 생각은 떨어진 기억력 탓에 며칠째 반복되고 있다. 요즘 하루에는 사계절이 다 들어있으니 내 머리도 헷갈릴 만 하다고 스스로 둘러댄다. 그나마 산 능선과 맞닿는 하늘의 형광 빛 파란색이 통증을 덜어준다. 하늘이 높아 보이는 이유가 뭣 때문인지 스무 번은 들은 것 같은데 또 모르겠다. 날씨 탓일까 나이 탓일까. 어느 때 이후로는 추석 쇠면서도 나이 한 살씩 더 먹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쨌든 10월이다. 한 아주머니가 명절 지나니 ‘시’자 들어가는 건 다 싫다고, 왜 달 이름도 그 모냥이냐고 했던 그 시월이다.

가을 하늘은 밤에도 시선을 훔친다. 떠오르는 달빛을 반사하는 구름이 밤하늘을 환하게 포장하고 있다.
가을 하늘은 밤에도 시선을 훔친다. 떠오르는 달빛을 반사하는 구름이 밤하늘을 환하게 포장하고 있다.

이틀째 캐는 고구마가 고랑에 줄을 서고 있다. 대체로 큰 편이다. 장딴지 만한 것도 있고, 어떤건 하지정맥류도 보인다. 모양이 맘에 안 들어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는데 잠시 농장에 들렀다 가시던 장씨아저씨가 “딱 주인 닮았구마” 하신다. 기분이 묘했다. 누가 자기 닮았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도 이런 마음일까. 자기 자식 같아 더 사랑스럽고 정이 갈만한데 왜 난 욕처럼 들리는 걸까. “에이, 좋은 말씀 놔두고...” 대꾸하다가 말았다.

얼마 전 저녁 먹다가 아내가 아들에게 물었다. “넌 누굴 닮은 것 같애?” 아들은 2초 후 대답했다. “다행히 엄마 아빠를 적절히 닮은 것 같아.” 순발력은 높이 살만했다. 하지만 그 말에 숨은 뜻을 내 모를 줄 알았더냐. 어린이 집 다니던 시절, 누군가가 “선재는 커서 아빠처럼 될 거야” 하면 급격하게 어두워지던 아이였다. 그때부터 아이는 짧고 굵은 걸 선호하지 않았다. 나도 아마 그 즈음부터 누군가 날 닮았다고 하면 상처를 받는 모양이다.

고구마가 들어앉은 흙 속 여기저기서 굼벵이가 보였다. 볼펜만한 지렁이도 갑작스런 햇빛에 몸을 뒤틀었다. 굼벵이는 고구마에 상처를 남기고, 지렁이는 두더지를 불러들여 땅속에 홈통을 만든다. 주워 온 밤에서도 밤벌레, 집게벌레가 부지기수로 나온다. 참 반갑지 않다. 얼마나 미웠으면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말처럼 애꿎게 비교의 기준이 되겠나. 하지만 말 그대로 인간보다 나은 버러지도 있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대하기는 힘들다.

오전엔 겨울 가을 거치더니 11시부터는 봄 없는 여름이다. 흔들거리는 호미 손잡이도 손볼 겸, 물도 마실 겸 농막에 들어왔다. 테이블에 고기 한 덩어리가 올려져 있다. 그제서야 장씨아저씨가 나가시면서 “다 되면 연락혀~” 하셨던 게 기억난다. 고기를 압력솥에 넣고 된장 한 숟갈 보태 삶았다. 라디오에선 연신 가을 타령이다. 올해 여름이 유난히 덥고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수확’ ‘풍년’같은 단어도 빠지지 않는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귀농 5년 차, 내 수확은 어떤가.

수첩을 펼치고 대차대조표를 그렸다. 윗줄에 ‘수입’ ‘지출’이라고 예쁘게 썼다. 그러고는 한참 쳐다봤다. 멍하다. 아득하다. 뭘 한답시고 내려왔건만 뭘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자 했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가 뭘 얻었지? 아무것도 없나? 집으로 찾아왔던 선교사 따라 교회를 이만큼 열심히 다녔으면 영생을 얻었을 텐데...’ 압력솥 꼭지는 딸깍 거리기 시작했고 머릿속도 흔들리기만 했다.

동네 어머님의 지도아래 청국장을 발효했다. 이틀만에 하얗게 고초균들이 발효된 모습이다.
동네 어머님의 지도아래 청국장을 발효했다. 이틀만에 하얗게 고초균들이 발효된 모습이다.

그냥 끄적거려봤다. 가까워진 것, 새로 생긴 것을 수입 란에 적었다. ‘지리산, 공기, 물, 간전댁할머니, 이장님댁 식구들, 섬진강, 오토바이, 마당, 농지, 어르신들, 형님들, 동생들, 농막, 내 맘대로, 시간, 일기...’ 멀어지거나 없어진 것들을 지출란에 적었다. ‘동창회, 캠핑, 동해바다, 마감, 야근, 초밥, 깔끔, 쇼핑, 끼어들기, 코딱지...’ 고마운 것도 있고 아쉬운 것도 있지만 이게 다인가 싶고 계산이 되질 않는다.

물 들어온 만큼 넘쳐야 하는 건가. 남들은 시골에 왔으니 건강해졌을 거라고 하지만 통풍도 가끔 찾아오고 허리는 쑤시고 팔꿈치 아픈 것은 이곳 어르신들을 따라가는 것 같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좋은 것도 있지만 그리운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그만큼이다. 즐기던 지리산이 근처에 있으니 좋겠다고 하지만 서울사람 남산 찾는 횟수랑 비슷해졌다. 내 일이니 내 맘대로 한다고 하지만 계절과 시기에 맞춰 움직여야 하는 농사일이 마냥 풀어지게 놔두진 않는다.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이 많아져 좋겠다고 하지만 훌쩍 커버린 아이는 기숙사로 들어가버렸고, 아내와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다툼도 늘어나게 된다. 주말부부가 전생에 쌓았을 공덕을 기리며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땅 파내면 물 고인다던가. 초밥보단 짜장면 맛에 예민해지고, 매일 보던 사람들은 뜸하지만 20년간 소식 없던 친구가 찾아온다. 텐트 치는 재미는 없지만 마루문 열면 야영이고, 주문진 오징어는 없어도 섬진강 눈치회는 자주 먹는다. 아침에 세수 안하고 나가면 꾀죄죄하지만, 뭐라고 할 사람 없고 근거는 없지만 겨울철 피부관리에도 나은 듯 하다.

맘 먹고 적어본 계산서가 별 무소득이다. 마음이라도 후련하자고 시작했건만 딱 떨어지는 게 없다. 장씨아저씨가 전화하셨길래 고기 다 됐다고 말씀 드렸고, D동생도 부르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다. 고구마 캐다 말고 점심 겸 술상이 마련됐다. 아저씨는 술도 안 드시면서 고기에 취하신 듯 했다. 젊었을 때 쌈질하던 무용담이 길어졌다. “내 서른 살 때 사람들이랑 경동시장에 오이 싣고 올라갔다가 서울 아그덜이 시비 붙길래 한 판 붙어줬지. 판이 겁나게 컸어. 경찰들 오고 난리 났었지” 아저씨는 고개를 삐딱하게 틀면서 회상하시는 듯 했다. “오, 본때 좀 보여 주셨겠네요.” “본때? 죽도록 맞았어. 경찰 안 왔으면 난 그 때 죽었어. 그 담부턴 서울 가서 안 싸우네.”

이 곳 싸움의 새로운 룰도 알게 됐다. “거 왜 저 아래 슈퍼 아줌마 있잖은가. 그 동생이 까불다가 나랑 한 번 붙었어. 한 30년 됐을 겨. 내가 많이 패줬지. 근데 며칠 뒤에 뒷집 아재랑 있는데 지가 잘못 했다는 거야. 그래서 다시 반쯤 죽여놨지.” 의아했다. “아니 아저씨, 와서 잘못했다는데 왜 또 때려요?” 아저씨는 오히려 내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셨다. “이봐, 그 사람이 나한테 까불었지? 그래서 나랑 싸웠지? 근데 잘못했다는 거지? 그러니 맞아야지. 잘못했다고 하면 끝인가? 죗값을 치러야지.” D동생도 물었다. “만약에 잘못했다고 안 했으면 어찌하는가요.” 아저씨는 뭘 그런걸 묻냐는 표정이셨다. “잘못했다고 할 때 꺼정 맞아야지.” 단순한 논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D동생과 내가 요즘 친일파 논란에 대해 얘기하니 아저씨도 한 말씀 하셨다. “그 사람들이 친일파라고 생각허는가?” 아저씨 말씀은 이랬다. 이완용이는 친일파지만 그 이후론 아니란다. 말하자면 ‘나만 먹구살자파’.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러시아가 들어왔으면 친 로스께가 되는 거고 중국이 들어왔으면 친 짱꼴라가 됐을 거다” 하셨다. 그러니 일본 순사 구두 닦아주던 놈들이 쭈욱 내려와서 전두환이 머리 빗겨준 것이고, 앞으로도 힘센 놈 똥구녕 닦아주면서 살 거라는 말씀이다. “단순허게 생각해봐. 그것덜은 야매(뒷거래)의 대가들이여. 그런 놈들이 또 일제시대처럼 되면 똑같이 안 하겠는가. 그러니 어떻게 독립 운동했던 사람덜한테 잘 해주겄는가?”

술자리는 아저씨의 독무대로 끝이 났다. D동생이 나가면서 아저씨께 인사했다. “저희는 배부르게 잘 묵었는디, 아제는 시장허시겄네요.” 아저씨는 손으로 입술을 훔치시면서 농장을 떠나셨고 나는 다시 오리궁뎅이 허벅지에 꿰차고 고구마 밭에 앉았다. 술기운도 돌고 배도 부르니 고구마 캐는 게 오전보다 힘들었다. 엉덩이 들썩거리며 서너 발짝 전진하니 그 새 땀이 밴다. 고개 드니 노고단이다. 아직 옷을 갈아입진 않았지만 한껏 다가온 듯하다. 봄엔 꽃 보느라 가까운 곳을 많이 보고, 가을엔 자연스레 시선을 멀리 두게 된다. 지척엔 일거리고 멀리는 절경이니 어쩔 수 없다.

장씨아저씨와 D동생이 농막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며칠 안보이면 궁금한 절친들이다.
장씨아저씨와 D동생이 농막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며칠 안보이면 궁금한 절친들이다.

호미질 하면서도 졸음이 왔다. 전화기에 이어폰을 꽂으니 지역방송이 들린다. 소통전문가라는 사람이 나왔다. ‘별 전문가가 다 있구나’ 싶었는데 ‘신입사원과 회식’이라는 주제로 얘기를 했다. 그 전문가는 신입사원들이 직장상사의 눈에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는 일도 잘해야 하지만 술자리에서도 분위기를 맞출 줄 알아햐 한다고 했다. 회식자리에서 외칠 건배사 하나쯤 준비해둬야 하고, 노래방에서 지나친 신곡은 자제하라고 했다. 1차 마치고 ‘한 잔 더할까’ 할 때 나서서 상사를 안내할 2차 장소쯤 미리 섭외해 두면 좋고, 가능하다면 업소 사장과 친해둬서 상사에게 본인에 대한 좋은 얘기도 부탁해 놓는다면 금상첨화란다. 내 참, 설상가상에 점입가경이었다. 소통의 방법이란 게 ‘야매’의 극치였다.

최근 아이 학교에서 진학설명회를 한다고 해서 다녀온 적이 있다.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의 진학 담당 교사가 열심히 강의했다. 딴에는 집중해서 들었는데 끝나고도 멍했다. 죽기 직전까지 공부하고, 최선을 다해 시험을 보고 나서도 작전 잘못 세우면 낭패 보는 학생들이야말로 최악의 극한직업인 듯 싶었다. 후비고 뚫어 사회에 나가서도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기술을 체득하지 못하면 미움 받고 미끄러질 수 있다니 무슨 낯으로 아이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봄에는 봄이라 힘들었는데 가을되니 또 그렇게 힘이 들어간다. 수확철이면 손이 모자라 같이 덤벙댄다던 부지깽이도 안 보인다. 호미 손잡이 빠지도록 땅 파다가, 허리 한 번 피고, 물 한 번 마시고 또 호미 잡고 사는 수 밖에 없다. 누구는 단순하게 살면 힘들어진다고 하고, 누구는 힘들어도 단순한 게 낫다고 부러워한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냥 요맘때, 위안을 주는 가을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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