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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 방위계획 허점 폭로로 편집국 폐쇄… 獨 언론 민주화 상징된 '슈피겔 스캔들'

입력
2015.10.0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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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0월 8일자 독일 시사 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의 커버스토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훈련계획 ‘Fallex 62’해부였다. 기사는 서독 방위계획의 허점도 폭로했다. 독일 정부는 국가기밀 누설(반역) 혐의로 슈피겔 발행인과 담당 기자 등을 기소했다. 10월 26일 경찰은 함부르크의 슈피겔 편집국에 들이닥쳐 수천 건의 자료를 압수하고 발행인 루돌프 아우크슈타인(Rudolf Augstein, 1923~2002ㆍ사진) 등 관련자를 연행했다. 담당기자 콘라드 알러(Conrad Ahlers)는 휴가 중 스페인 한 호텔에서 끌려가기도 했다. 편집국은 4주간 폐쇄됐다. 이른바 ‘슈피겔 스캔들’이었다.

1947년 1월 창간한 슈피겔은 1950년 독일 수도가 본으로 결정되는 과정을 추적해 국회의원들의 매수 의혹을 제기하는 등 권력 비리와 남용 사례를 매섭게 보도했다. ‘스캔들’ 직전에도 한 군수시설 건설 과정에서 뇌물이 오간 정황을 폭로, 정부와 기소 공방을 벌인 터였다.

‘스캔들’로 슈피겔의 멱살을 틀어쥐려 했던 독일 정부는 거꾸로 거센 여론의 역풍에 직면했다. 시민들의 정부 성토 시위가 이어졌고, 보수지 ‘디벨트’까지 거기 동조했다. 슈피겔은 언론 민주화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석 달여 뒤 아데나워 총리와 국방장관이 사임했고, 아우크슈타인 등은 구금 103일 만에 풀려났다. 독일의 민주주의가 슈피겔 사건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발행인 겸 단일주주 아우크슈타인은 69년 말 직원총회에서 회사 주식의 절반을 직원에게 양도한다고 발표한다. 권력뿐 아니라 주주도 경영진도 보도 독립성을 훼손할 수 없다는 신념의 결단이었다. 그는 약속대로 이듬해부터 수익금 절반을, 76년부터 영업지분 50%를 직원들에게 배분했다. 그는 55년간 슈피겔 기자였고, 편집인이었다. 2000년 국제언론연구소(IPI)는 그를 ‘세계 언론자유 50인의 영웅’에 선정했다.

아우크슈타인의 칼럼과 인터뷰 등을 엮은 책 ‘권력과 언론’(안병억 옮김, 열대림)은 그와 슈피겔의 역사, 독일 현대 정치사를 충실히 보완하는 책이다. 무엇보다 저널리즘의 원칙이 거기 있다. “저널리스트는 선거에 이기고 정당을 후원하라고 위임장을 받은 게 아니다.(…) 저널리스트의 최악의 적은 정치인과 호형호제하며 허물없이 지내는 것이다.(…) 저널리스트는 정치인과 영원한 우정을 나눌 수 없다.” 2002년 그가 숨지자 기민당 총재였던 앙겔라 메르켈 현 총리는 “그의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 특히 우리 기민당에 항상 달콤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아니었다면(…)”운운하며 그를 기렸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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