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소비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추진하는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추석 후 유통업계 합동 할인) 행사가 업계와의 충분한 협의나 준비 과정 없이 진행되면서 계속 잡음과 논란을 낳고 있다.
"최대 50∼80%" 등의 홍보 문구가 난무하지만 할인율 기준은 모호하고, '졸속' 논란에 놀란 유통업계가 추가 세일에 나서자 이미 상품을 구입한 고객들은 한순간에 '호갱'(호구+고객·어수룩해서 이용당하는 손님) 처지가 됐다.
◇ 오영식 "일부 블프 할인율 뻥튀기"…정부, 블프 기간 할인율 표시 규제 완화
6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 오영식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코리아블랙프라이데이 행사에 참가한 일부 유통업체들은 정가를 부풀린 뒤 그 기준으로 할인율을 적용해 소비자는 결국 평소 시중 가격보다 더 비싼 값에 할인 상품을 샀다.
오 의원이 제시한 실례를 보면,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 행사상품으로 96만원에 판매된 정가 172만원짜리 TV는 다른 온라인 쇼핑몰에서 78만원에 살 수 있었다. 한 대형마트에서 1천290원짜리를 1천200원에 판다고 광고한 초코과자의 실제 최근 1개월간 평균 가격은 900원대에 불과했다.
사실 이 같은 '할인율 뻥튀기' 문제는 이미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를 위해 정부가 할인율 표시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밝힌 순간부터 예견됐다는 게 유통업계의 지적이다.
지난달 22일 산업통상자원부(이하 산자부)가 배포한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 개최' 시행 관련 첫 보도자료를 보면, 정부는 "업체들이 참여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애로·건의 사항을 관계부처가 공동으로 사전에 해결했다"며 대표 사례로 '표시광고법 규제 적용 예외' 건을 들었다.
현행 표시광고법 하위 고시는 '자기가 공급하는 상품을 할인 또는 가격인하해여 판매하고자 하는 경우 허위의 종전거래가격을 자기의 판매가격과 비교해 표시·광고하는 행위'를 부당 표시광고로 규정하고 있다.
아울러 종전가격은 '당해사업자가 당해상품과 동일한 상품을 최근 상당기간(과거 20일 정도)동안 판매하고 있던 사실이 있는 경우로서 그 기간에 당해 상품에 붙인 가격'이라고 정의했다.
쉽게 말해 할인 시점으로부터 이전 20일 정도는 유지된 가격을 기존 가격 기준으로 제시하고, 그로부터 정확한 할인율을 밝혀야 한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정부는 보도자료상 '조치 현황'에서 "(공정거래위원회가) 이번 행사(블랙프라이데이)를 특별한 경우로 인정해 해당 규제(표시광고법에 따른 종전가격) 적용을 제외한다"고 밝혔다.
이번 블랙프라이데이에 참여하는 업체들이 광고하는 할인율에 대해서는, 기존 '종전가격 20일 유지' 규정을 엄격히 적용하지 않겠다는 얘기이다.
정부 관계자는 이와 관련, "추석 관련 할인행사가 끝난 뒤 곧바로 블랙프라이데이 할인 행사가 이어지기 때문에, 두 행사 사이에 20일 정도 종전가격을 유지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며 "그래서 한시적으로 이번 블랙프라이데이 행사 기간에는 추석 할인행사 이전 가격 등을 기준으로 할인율을 표시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유통업계 일각에서는 "사실 업체가 이 한시 예외 규정을 악용하려고 들면, 오히려 평상시보다 비싼 가격으로 짧게 몇 일 동안만 팔다가 이 가격 기준으로 높은 블랙프라이데이 할인율을 표시해 '미끼'로 활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가 나왔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20일 규정을 한시적으로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불법 할인율 부풀리기를 공정위가 봐주겠다는 뜻은 아니다"라며 "불공정행위가 발견되면 추석 전 가격이나 여러 근거를 바탕으로 조사가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됐다.
◇ 불과 1주일 사이 같은 상품 10∼20% 추가 세일…소비자 '허탈'
지난 1일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가 시작된 이후 "할인 품목과 할인율이 제한적이라 통상적 가을세일과 다를 게 없다"는 비난이 쏟아지자 유통업계가 고육지책으로 준비한 '추가 세일'도 소비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기는 마찬가지이다.
6일 주요 유통업체들은 일제히 보도자료를 내고 "블랙프라이데이 할인 브랜드를 늘리고 할인율도 높이겠다"고 발표했다.
예를 들어 롯데백화점은 8일부터 18일까지 테팔·필립스·나인 등 인기 브랜드 40여개가 새로 코리아 그랜드 세일(가을세일)에 참여하고, 메트로시티·러브캣·지고트·박홍근 등 70여개 패션·리빙 브랜드는 할인율을 기존 수준보다 10∼20%포인트 높일 계획이다.
특히 백화점이 마진을 남기지 않고 그만큼 가격을 낮춘 노마진(No-margin) 상품전도 마련했다. 이번 노마진 행사에는 140여개 브랜드의 450여개 품목이 참여하며 준비된 상품은 모두 100억원 규모이다.
롯데마트는 8∼14일 100여개 주요 PB(자체 브랜드) 상품을 준비하고 '다다익선' 할인 행사를 진행한다. 같은 품목을 2개, 3개 구매하면 각각 10%, 20% 깎아준다.
신세계도 14일까지 편집숍에 입점한 브랜드의 할인율을 최대 20%포인트 높여 손님을 맞기로 했다. 각 편집숍의 할인율은 ▲ 분더샵 50∼90% ▲ 분컴퍼니 최대 70% ▲ 분주니어·핸드백컬렉션·슈컬렉션·란제리 컬렉션·피숀 50∼80% 등이다.
현대백화점 역시 18일까지 진행되는 '코리아 그랜드 세일' 중 르카프·케이스위스·쿠쿠 등 50여개 브랜드의 세일률을 10∼20%포인트 추가하기로 했다. 앤디앤댑 등 40여개 브랜드의 경우 아예 새로 세일에 참여해 10∼20% 할인에 나선다.
또 현대백화점이 직접 운영하는 편집숍들은 일부 직매입한 상품 가격을 10∼30% 추가로 깎아 최대 할인율을 90%까지 높인다.
"타이틀만 거창하고 실속없는 블랙프라이데이"을 비난을 받아들여 고객들에게 추가로 실질적 혜택을 주겠다는 취지는 바람직하지만, 이미 지난 1일부터 지금까지 '코리안 그랜드 세일',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 등의 홍보 문구에 이끌려 상품을 구입한 소비자들은 허탈할 수밖에 없다.
이미 구매한 상품과 같은 브랜드, 같은 품목이라도 불과 1주일 사이에 10∼20% 추가 세일에 들어가거나, 아예 이달 초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초특가 상품이 곧 나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혜택을 늘린다는 측면에서 할인 품목과 할인율을 늘렸지만, 블랙프라이데이 초기에 상품을 구매한 고객에게는 사실 미안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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