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퇴근길은 귀뚜라미 악사들의 연주가 있어 심심하지 않다. 대로를 벗어나 동네 골목길로 접어들면 그들이 연주하는 소리가 들린다. “귀릭 귀릭 귀릭~” 하기도 하고, “끼끼 끼끼끼끼~”로 들리는 소리도 있다. 앞엣것은 극동귀뚜라미이고, 뒤는 알락귀뚜라미다.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귀뚜라미 종류는 30종이 넘는데 그 가운데 서울에서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게 극동귀뚜라미와 알락귀뚜라미다.
이들은 생존력이 뛰어나서 삭막한 도시 어느 곳에서도 살아간다. 도시 주택가라도 풀섶이 우거진 곳에서는 더 아름다운 귀뚜라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귀뚜라미 종류 중 몸체가 가장 큰 것은 왕귀뚜라미라고 불리는 녀석으로, “귀뚜루루루~” 하고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낸다. 기타 줄을 고를 때 나는 소리 비슷하다. 가장 전형적인 귀뚜라미 소리인데, 대도시에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게 아쉽다.
귀뚜라미 중에 풀종다리라는 녀석도 있다. “키리리리리리~” 하고 긴 호흡으로 우는데 약한 착암기 소리처럼 들린다. 주로 낮에 울어 아침 출근길에 귀를 붙잡는다. 이 녀석은 몸집이 작고 나무 가지 사이에 교묘하게 붙어 울기 때문에 낮이라도 좀처럼 모습을 보기 어렵다.
귀뚜라미과에 속하는 긴꼬리는 귀뚜라미보다는 여치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전체적인 몸 색깔은 연두색조다. 푸른 잎사귀 뒤에 숨어 우는데 “러러러러~”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들으면 “코롱코롱코롱~”으로도 들린다. 소리에서 분명히 ‘ㅋ’과 ‘ㄹ’ 음가가 느껴지지만 흉내 내기가 쉽지 않다. 긴꼬리는 큰 잎사귀에 구멍을 내 머리만 살짝 앞으로 내밀고 잎 뒷면 꼬리 부분의 날개를 세워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요즘 밤 교외에 나가면 수많은 긴꼬리의 합주가 대단하다.
귀뚜라미는 날개를 비벼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오른쪽 날개에 있는 날카로운 돌기로 왼쪽 날개의 마찰판을 비비는데 바이올린 켜는 원리와 같다. 가슴의 진동막을 울려 소리를 내는 매미가 관악기라면 귀뚜라미는 현악기라고 할 수 있다. 매미 종류나 귀뚜라미 종류 모두 소리를 내는 것은 수컷이다. 짝짓기를 위해 아름답고 우렁찬 세레나데, 연가(戀歌)로 암컷을 유혹하는 것이다.
귀뚜라미 소리로 기온을 잴 수 있는 공식이 있다. 25초 동안 우는 횟수를 3으로 나눈 뒤 4를 더하면 섭씨 온도가 나온다고 한다. 예를 들어 25초 동안 48회를 울었다면 48/3+4=20도가 된다. 하지만 막상 귀뚜라미 소리를 들어보면 어떻게 일정 시간에 우는 횟수를 잰다는 것인지 난감하다. 알고 보니 실험에 이용된 것은 일반 귀뚜라미가 아니고 긴꼬리였다.
귀뚜라미를 가을의 전령이라고 하지만 실은 귀뚜라미가 가장 왕성하게 우는 시기는 장마가 끝난 직후인 7월말부터 8월 중순쯤이다. 대부분의 풀벌레들이 그렇다. 일년 중 가장 온도가 높은 이 시기는 풀벌레들의 발음기관이 팽팽해져 더 높고 우렁찬 울음소리를 낸다. 그 시기에 비하면 10월 초의 풀섶은 조용한 편이다. 귀뚜라미는 변온동물이라 온도에 민감하지만 11월 말까지도 풀섶에서 활동한다. 하지만 기온이 떨어지면서 우는 소리가 점점 약해지고 빈도도 뜸해진다.
긴 침묵은 다음해 5월 중순쯤까지 이어진다. 풀섶의 그 오랜 침묵을 처음 깨는 건 봄여름귀뚜라미다. 초여름귀뚜라미라고도 하는 이 녀석은“뤼이익 뤼이익~” 하고 운다. 짝짓기가 끝난 암컷은 긴 산란관을 땅속에 꽂고 알을 낳는데 알 상태로 겨울을 나고 다음해 봄 부화한다. 불완전 변태를 하기 때문에 애벌레가 아니라 약충(어린 귀뚜라미) 상태로 성장하며 6, 7차례 허물을 벗은 뒤 대개 7월 말 8월 초에 성충이 된다. 이때부터 귀뚜라미의 아름다운 연주를 들을 수 있다.
하루가 다르게 나뭇잎 색깔이 달라지며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풀섶이나 계단 근처에서 귀뚜라미 연주를 들을 시간도 많이 남지 않았다. 한 해가 또 저물어 간다는 뜻이다.
수석 논설위원
*생활 주변의 꽃ㆍ풀, 나무, 곤충 이야기를 담은 ‘이계성의 자연탐구생활’을 새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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