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애슬레저 패션이 불편한 이유

입력
2015.10.01 20:00
0 0

얼루어(Allure)란 단어가 있다. 모 패션잡지의 제호로 잘 알려져 있지만, 원래 매혹이란 뜻을 갖고 있다. 14세기부터 여성들의 인기 여가활동인 매사냥과 관련된 단어였다. 사냥용 매를 훈련시키는 미끼, 기법이란 뜻이었다고. 나아가 누군가를 유혹하는 ‘걸음걸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계절마다 유행의 부침을 겪는 패션품목들은 다양하지만, 청바지처럼 한결같이 사랑 받는 옷들도 있다. 그만큼 소비자를 매혹하는 힘이 있고 나름의 이야깃거리들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사랑받던 품목이 특유의 얼루어를 잃고 다른 것에 자리를 내어줄 때, 이 순간은 나처럼 패션의 방향을 타진해보려는 이들에겐 중요한 시점이 된다. 패션 트렌드는 사회 내부에서 확산되는 문화적 변화의 징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최근 떠오르는 트렌드 중 하나가 애슬레저(Atheleisure)다. 애슬레저란 운동(Athlete)과 여가(Leisure)의 합성어다. 일상복과 운동복의 경계가 허물어진 패션의 경향을 일컫는다. 운동복 차림으로 쇼핑도 가고, 다양한 사회생활의 장에도 참여할 수 있다는 게 이 트렌드의 미덕이다. 여성들이 한결같은 사랑을 바쳐왔던 청바지를 버리고, 요가팬츠를 대신 선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스포츠와 레저, 패션이 한 몸으로 묶이기 시작했다는 것, 여기엔 스포츠와 레저, 패션이 각각 독립적인 영역을 유지하고 있을 때와는 다른 시대정신이 담겨있다는 뜻이다. 스포츠는 경쟁에 토대를 둔 전문가의 영역이었다. 반면 운동은 그 주체인 일반인이 일상적으로 건강 유지를 위해 하는 활동이었다. 2012년에 들어오면서 요가나 헬스 등 피트니스용 의류 시장 규모가 전체 스포츠용품 시장의 절반을 넘었고, 워킹 조깅 헬스용 운동화 시장은 지수 성장을 했다. 반면 기존의 농구 테니스 야구 운동화 시장은 고꾸라졌다. 무엇보다 여성 소비자가 스포츠 제품 수요의 5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피트니스 관련 강습을 받는 여성들의 숫자는 팀 스포츠를 향유하는 인구보다 다섯 배 많아졌다. 기존의 전문 스포츠 선수들이 경쟁과 도전, 극한의 즐거움과 같은 가치를 위해 스포츠 행위를 했다면, 여성 소비자들은 건강과 체중관리, 외모관리를 위한 투자수단으로 운동을 받아들였다.

이런 흐름은 패션소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여성들의 피트니스 의상인 요가 팬츠는 작년보다 매출이 3.5배가 늘었고, 3개월 만에 6만8,000개의 신규 스니커즈 디자인이 쏟아졌으며, 스포츠 브라 매출은 현재 브라 시장의 20%를 차지한다. 한 다국적 은행의 분석에 따르면 애슬레저웨어 시장이 2020년까지 1,000억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한다. 대형 스포츠용품 기업들도 트레이닝 센터를 짓고 적극적으로 애슬레저 고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사회 내부의 어떤 경향성을 읽는 문제는 경제적 분석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 사회 내부에서 점점 차오르는 집단의 열망을 읽는 문제이기에. 애슬레저는 왜 여가란 단어와 연결될까? 여가(Leisure)라는 단어는 ‘자유로운’ 혹은 ‘허용되는’ 이란 뜻의 라틴어 ‘Licere’에서 나왔다. 이 말은 의무나 책임, 구속과 강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뜻했다. 허가증이란 뜻의 라이선스(License)도 여기에서 나왔다. 이 단어가 태어난 것이 르네상스 시대다. 이때 상류층들은 미술과 음악을 비롯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데 열을 올렸고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다른 집단과 구별하고자 했다. 이 욕구가 ‘여가’ 개념을 만들어낸다. 상류층은 여가를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독점했다. 여가란 충분한 돈과 교양, 시간, 섬세한 취미를 확보할 수 있을 때라야 가능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여가를 통해 인간은 ‘자유로운 인간’이 될 허가증을 획득했다.

오늘날의 몸을 만드는 핏(fit) 행위는 신체자본을 가장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이다. 운동하지 않아도 운동복을 입고 다양한 여가를 즐기고 사회생활의 무대로 들어서는 것, 이것이야 말로 신체자본의 유연한 관리만이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허가증임을 믿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타인에게 나의 신체관리방식을 자랑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몸에 대한 강박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인가. 이런 세상에선 신체를 관리할 시간과 자본을 갖지 못한 이들은, 세상이 설정한 방식의 신체를 갖지 못한 이들은 설 길이 없다. 돈 되는 트렌드라며, 짧은 유행에 그치지 않을 거라며 패션 회사들은 쌍수를 들지만 불쾌한 마음이 드는 건 그런 이유다. 레깅스는 체육관에 벗어두고 왔으면 좋겠다.

김홍기ㆍ패션큐레이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