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일이다 보니 남의 집을 구경할 기회가 잦다. 집들이를 제외하면 웬만해서는 집에서 사람을 만나고 접대하는 문화가 없는 한국에서 생면부지의 낯선 이의 집을 방문하는 일은 흥미로운 경험이다. 주택, 그것도 집안의 모습은 사는 이의 거의 모든 것을 드러낸다. 흔히 인테리어라고 불리는 실내 마감과 가구, 살림살이는 집주인의 안목과 경제력, 취향, 가족 관계 등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최근 전시 준비와 잡지 기고 등으로 자주 들른 곳은 분당의 신시가지로 개발된 서판교 주택 단지다. 서판교 지역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그러니까 아파트 가격 하락이 본격화된 이후에 입주가 시작된 곳으로 1,200여 세대의 단독주택 필지가 집중되어 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대략적인 프로필은 다음과 같다. 입주한 700여 세대 건축주의 평균 나이는 46.7세, 땅값과 건축비를 합해 대략 12억~15억 정도를 동원할 수 있을 재력을 갖춘 이들이다. 자녀는 두 명 정도다. 게다가 이들은 신화가 무너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대단지 아파트가 제공하는 여러 이점을 버리고 개인의 삶을 더 우선시 해 단독주택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안정적인 경제력을 확보했으며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모델이 뚜렷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2015년 한국 사회 중상류층의 선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살피는 데 판교만한 곳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독주택을 건축으로 평가할 때 빼놓지 않아야 할 것, 이를테면 도시나 이웃집을 대하는 태도, 내외부 공간의 관계, 재료와 마감의 선택 등을 제외하고 유독 눈여겨 보는 것이 있다. 건축가가 이 프로젝트에서 얼마나 역량을 발휘했는지와 무관하게 건축주를 엿보는 일이다. 청탁 받은 원고와는 무관하지만 더 흥미로운 구석이다. 아파트의 표준 평면에서 벗어나 원하는 대로 공간을 배치할 수 있을 때 무엇에 가장 힘을 쏟았는가와 집에 꽂힌 책의 양과 종류다. 전자가 개인의 취미와 욕망이 주택 공간을 어떻게 다채롭게 하는지 보여준다면, 후자는 집 구성원들의 관심사, 지적 수준,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지표다. 집안의 장서만큼 집주인을 알려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책으로 사람들을 엿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판교에서 작동하지 않았다. 취향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의 책이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책이 집을 꾸미는 최고의 장식품이라는 말은 책에나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더 인상적인 풍경은 어린 자녀가 있는 집은 거의 예외 없이 한글보다 영어 그림책, 동화책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자녀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님에도 단 한 권의 한글 책이 없는 집도 있었다.
사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판교의 표준 입주자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은 세대, 글의 힘이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믿은 세대다. 그러나 이제 그 시절은 옛추억 속에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인문사회과학을 떠났고, 자녀에게 한글책보다 영어책을 먼저 권한다. 이는 통계를 바탕으로 한 분석이 아니기에 일반화해서 말할 수는 없다. 아주 적은 표본에 대한 인상일 뿐이다. 그러나 판교라는 진입 장벽을 넘은 이들의 욕망은 점차 그 수가 줄어드는 한국 중산층이 꿈꾸는 바나 다름없다.
오해는 말자. 인문학을 외면하고 영어 조기 교육에 매진하는 중산층의 속물적인 태도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비판이 들리지 않는 곳에서 현실이 작동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한국사회에서 지식이 어떻게 유통되는지, 도처에서 들먹이는 인문학이 왜 현실에서는 무기력한지, 영어에 과몰입하는 교육이 효과가 없다는 진단이 씨알도 안 먹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판교 주택의 서가만큼 잘 보여주는 징후가 또 있을까. 글을 쓰는 이들은 저 욕망과 불안에 답하고 있을까.
지금 이 시간 교보문고 광화문점의 외국어서적 코너는 확대 리노베이션 중이다.
박정현 건축평론가ㆍ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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