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계곡(谿谷) 장유(張維ㆍ1587~1638)의 ‘객회(客懷)’라는 시에 “망향대에 오르니 공연히 슬퍼지네(望鄕臺上空??)”라는 구절이 있다. 객회는 글자 그대로 ‘나그네의 감회’란 뜻이고, 망향대란 고향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기 위해서 높게 쌓은 대를 뜻한다. 망향대는 여러 곳이 있었는데, 시인들은 주로 당나라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고향인 성도(成都)에 있던 망향대를 많이 읊었다. 그보다 이른 전한(前漢) 성제(成帝ㆍ재위 서기전 33~서기전 7) 때 장군 왕궤(王潰)가 쌓은 망향대도 있다. 왕궤가 변방에 싸우러 나갔을 때 왕망(王莽)이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웠다. 왕궤는 이민족에게 투항해 부하들과 함께 망향대를 쌓고 올라서 고향을 바라보았다는 고사이다.

조선 초기 정도전(鄭道傳)은 ‘관산의 달(關山月)’이란 시에서 “소무는 어느 때 돌아오려나/ 이릉 역시 돌아오지 못했네/ 흰 깃발이 흩어지고 성겨졌는데/ 망향대는 마냥 적막하네(蘇武何時返/ 李陵亦未廻/ 蕭疎白?節/ 寂寞望鄕臺)”라고 노래했다. 소무(蘇武)는 한 무제(武帝)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19년 동안 억류당한 채 북해(北海ㆍ바이칼호) 부근에서 양을 쳤던 인물이다. 양 칠 때도 흰 털로 만든 한 나라의 깃발을 해질 때까지 들고 다녔다. 이릉(李陵)이 흉노와 싸우다가 항복하자 한 무제가 가족을 모두 죽여 버렸다. 이후 소제(昭帝)가 즉위해서 불렀지만 거부하고 이역에서 죽은 인물이다. 정도전은 소무와 이릉의 일화를 말하면서 자신이 변방에서 그리는 망향의 그리움을 노래한 것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 때문이기도 하다. 성호 이익의 ‘김회중(金晦仲)을 보내며’라는 시에 “옛 자취는 죽마 타던 거리에서 찾고/ 새 시름은 망향루에 오르겠네(舊迹行尋騎竹巷/ 新愁應上望鄕樓)”라는 구절이 있다. 죽마를 탄다는 뜻의 기죽(騎竹)은 곽급(郭伋)에 대한 일화이다. 곽급이 왕망의 신나라 때 병주목(幷州牧)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후한 광무제가 그를 다시 병주목으로 임명하자 곽급의 선정을 기억하는 노인들이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마중 나오고, 어린 아이들은 대나무로 만든 죽마를 타고 나와 절했다는 데서 생긴 일화이다. ‘후한서(後漢書)’ ‘곽급(郭伋) 열전’에 나온다.

우리 유행가 가사 중에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라고 노래하다가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라고 끝맺는 노래가 있다. 후한(後漢) 헌제(獻帝) 건안(建安) 연간(196~220)에 건안칠자(建安七子)라고 불리는 뛰어난 문인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그 중 한 명인 왕찬(王粲)이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의 식객으로 있으면서 지은 시가 ‘등루부(登樓賦)’이다. 성루에 올라서 “참으로 아름답지만 내 고향은 아니니/ 어찌 잠시라도 머물겠는가(雖信美而非吾土兮/ 增何足以少留)”라는 시이다.

음력 9월 9일을 홀수 곧 양수(陽數)가 겹치는 날이라고 해서 중양절(重陽節)이라고도 하는데, 이날 높은 곳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며 재액(災厄)을 피하는 등고(登高) 풍습이 있었다. 후한 때 비장방(費長房)이라는 도인(道人)이 항경(恒景)에게 “9월 9일 높은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면 재액을 피할 수 있다”고 권고했다.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고 집에 내려오니 집에서 키우는 가축이 모두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고려 문인 임춘(林椿)은 ‘9월 9일 모임에서 여러 공의 말을 듣고(九日聞諸公有會)’라는 시에서 “어디로 올라야 망향대가 있을까(登高自有望鄕臺)”라고 읊었다. 재액을 피하기 위해 등고(登高)하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함께 달래고 싶다는 뜻의 시구다.

한나라 소무와 이릉처럼 외부적 요인으로 갈 수 없는 고향은 더욱 그립기 마련이다. 귀향객도 마찬가지인데, 조선 중기의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은 ‘망향대시(望鄕臺詩)’에서 “관서 땅에 유배 온 지 몇 해 째인가/ 책과 검 들고 티끌처럼 떠도는 일생 슬프도다(關西落拓今幾年/一生書劍悲塵埃)”라고 노래했다. 책과 검이란 선비가 평생 손에서 놓지 않아야 될 두 가지 물품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당나라 시인 고적(高適)의 “동산에 한 번 누워 봄을 삼십 번 보내니/ 책과 검이 풍진 속에 늙은 것을 어찌 알겠는가(一臥東山三十春/ 豈知書劍老風塵)”라는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순조 10년(1810)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이 언덕에서 인생 마칠 만한데/ 하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빌겠는가(玆丘可終老/ 何必?還鄕)”라고 노래했다. 더 이상 고향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시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옛 자취 외에도 만나야 할 가족이나 친지가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남북이 합의한 이산가족 상봉에 암운이 드리우고 있다는 보도다. 수천만이 고향 찾아갈 때 보름달만 바라보았던 이산가족의 심정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작은 정치적 이해타산은 내던질 수 있을 것이라는 주문이 필자가 순진한 탓이 아니기만 빌 뿐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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