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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명절 대피소

입력
2015.09.3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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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자로 일하는 동안 명절 연휴 전부를 온전히 가족, 친척들과 보낸 경우는 거의 없지만 친척들과의 해후는 늘 반갑고 편안했다. 실향민인 어른들이 연로하시면서 대화에 벽을 느끼는 경우가 잦아지고, 중장년을 넘긴 사촌들의 현실 삶이 팍팍해져가도 가족애는 돈독했다. 기자라는 직업상 어른들의 관심사와 궁금증에 답하고 가끔 논쟁까지 해야 하는 부담과 피로감이 있었지만 그 정도는 감내할만한 일이었다. 가족애는 늘 중층적인 감정들이 실타래처럼 섞였다가 풀리고 하면서 쌓여 가는 것 같았다.

▦ 현장 기자 시절 새로운 명절 트렌드로 ‘역(逆)귀성’과 ‘콘도 차례’현상을 보도한 적이 있다. 생업에 치여 사는 자식을 위해 지방의 부모들이 햇과일, 햇곡식을 싸들고 귀경하는 모습, 아예 전 가족이 휴양지 숙소에서 차례를 지내는 모습은 종전엔 볼 수 없던 현상이었다. 그게 벌써 20여 년 전 일이다. 이제는 명절 연휴 때마다 공항 출국자수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소식이 낯설지 않을 정도다. 명절에는 꼭 가족 친척들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인식이 많이 엷어진 탓이다.

▦ 이번 추석 명절의 새로운 트렌드는 무엇일까 궁금해서 관련 기사를 쭉 훑어가다 ‘명절 대피소’라는 표현이 눈에 띄었다. 취업 준비를 돕기 위해 한 대형학원이 이런 이름의 자습실을 열었고 무려 600여명이 이용했다는 소식인데, 자습실을 ‘대피소’로 명명한 게 이채롭다. 명절에 가족 친척들이 쏟아낼 무수한 관심으로부터 청년세대들이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최악의 취업난에 친척들의 애정 어린 관심은 물론 의도적인 무관심조차 견디기 버거워 하는 청년세대의 현실이 고스란히 투영된 결과이리라.

▦ 올해 추석 명절 기사는 유독 청년세대를 중심에 둔 것들이 많았다. 3포, 5포, 7포를 넘어‘N포’세대로 불리는 청년세대를 둘러싼 엄혹한 현실은 그들에게서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기회와 시간마저 앗아갔다. 청년세대가 귀성보다 ‘명절 대피소’를 찾아 취업시험 준비를 해야 안심이 되는 현실, 명절 음식보다‘혼밥’이 시간 절약에 그만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현실, 귀성보다 명절 아르바이트 특근비 한 푼을 더 아쉬워해야 하는 현실…. 이러다 가족의 의미가 형식화하고 형해화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황상진 논설위원 apri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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