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쇠러 시골집에 갔더니 마당에 나팔꽃이 잔뜩 피어 있다. 본채 앞이 전에 없이 화사해진 느낌이었다. 네발짐승들이야 워낙 먹을 것 찾아 자주 기웃거렸지만, 아이 손바닥만한 나비와 큼지막한 말벌의 내왕은 짐짓 볼거리였다. 특히, 커다란 부채를 연상케 하는 검은 나비는 유독 눈에 띄었다. 사흘 내내 나타났다. 하루 종일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닌데, 꽃밭에 시선을 주기만 하면 나타나는 게 신기했다. 시간대도 얼추 일정했다. 오전 열시 정도면 어김없이 꽃대롱 위에 앉아있거나 꽃밭 주위를 선회했다. 사진을 찍으려 했는데, 그때마다 무슨 기척이라도 느꼈는지 액정 바깥으로 달아났다. 공기 중에 무슨 위협을 암시하는 나비만의 신호체계가 있는 건가 싶었다. 몇 번 거듭한 끝에 꽃대롱에 앉은 모습 하나, 대롱에서 막 날아오르는 모습 하나를 포착했다. 그러곤 가만히 보기만 했다. 시간이 멈추고, 모든 사물이 돌연 정지하면서 오로지 나비만이 팔랑거리는 고요한 세계가 펼쳐졌다. 나비가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나비가 떠나고 돌이켜본 그 시간은 이상하게 깊고 은은했다. 머릿속이 나비만큼이나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찍어둔 사진을 봤다. 꽃대롱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검은 실루엣이 비치고 있었다. 검고 짙은 여운과 함께 몸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이생을 이미 지나친, 누군가의 기나긴 한 생애일 거라 여겼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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