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엔터테인먼트팀장으로 영화를 담당하고 있는 라제기기자가 영화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영화에 대한 이해와 다양한 시선을 제공하는 코너입니다.
상영 중인 영화 ‘서부전선’을 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지난해 여름 개봉했던 ‘해적: 바다로 간 산적’(‘해적’)가 떠오른다. 두 영화의 제작사는 하리마오픽쳐스. 두 영화의 각본은 천성일 하리마오픽쳐스 대표가 맡았다(천 대표는 ‘서부전선’으로 감독 데뷔까지 했다). 투자배급사는 롯데엔터테인먼트이고 두 영화 모두 적지 않은 제작비(‘해적’은 150억원, ‘서부전선은 70억원)가 들어간 대작이다. 천 대표의 기발한 상상력에 반한 롯데엔터테인먼트는 두 영화 각본을 묶음으로 구매했다는 후문이다. 이란성 쌍둥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관계다.
태생과 성장 과정이 비슷해서일까. 두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닮았다. 진지하고 심각할 수 있는 이야기를 웃음으로 풀어낸다. 특히 B급 유머가 도드라진다. 하지만 ‘해적’은 866만6,208명(영화진흥위원회 집계)을 동원하며 흥행했으나, ‘서부전선’은 대박을 터트릴 가능성이 낮다. 27일까지 29만4,480명 관객을 모았을 뿐이다. 흥행 반전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해적’엔 있고 ‘서부전선’엔 없는 것은 과연 무엇이길래 흥행 희비곡선이 그려진 것일까.
▦감초 연기자에 웃고 울고
‘해적’의 출발점은 위화도 회군이다. 고려가 역사 속으로 저물고 조선이라는 해가 새로 떠오른 시기를 배경으로 했다. 혼란기에 발호한 산적과 해적이 영화의 두 축을 이룬다. 조선 사신이 명나라로부터 받은 국새를 고래가 삼킨, 황당무계한 사건 뒤 벌어지는 좌충우돌의 코미디가 130분을 관통한다. 장쾌한 볼거리와 호쾌한 액션, 호탕한 웃음을 버무리겠다는 기획 의도는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866만6,208명(영화진흥위원회 집계)을 동원한 이 복합장르 영화의 힘은 온전히 웃음이었다.
‘서부전선’도 6ㆍ25전쟁 막바지라는 역사를 배경으로 삼는다. 웃음을 주조로 하되 눈물로 끝맺음을 하려 한다. ‘웰컴투동막골’과 ‘고지전’의 조합처럼도 보인다. 실컷 웃게 하다 눈물까지 흘리게 하면 더할 나위 없는 상업적 전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늙다리 국군 남복(설경구)과 소년 인민군 영광(여진구)은 서로를 의심하고 견제하다 어느 순간 나이와 이념을 뛰어넘어 우정을 맺는다. 우연히 벌집을 건드렸다가 벌침에 된통 당한 두 사람이 서로를 위무할 때부터 둘은 가까워진다. 퉁퉁 부어 오른 말복의 입술과 툭 튀어나온 영광의 눈두덩이를 보고선 웃음을 참을 수 있는 관객은 몇 없다.
하지만 ‘서부전선’은 ‘해적’처럼 웃음으로 내달리진 못한다. 결말이 품고 있는 비극이 주요 요인이기는 하나 주연에 맞먹는 감초 연기자의 부재도 큰 이유다. 설경구와 여진구의 연기력은 만만치 않으나 112분을 온전히 담당하기에는 무리다. ‘해적’을 돌아보자. 선남선녀 장사정(강남길)과 여월(손예진)을 투톱으로 세우고 철봉(유해진)과 스님(박철민), 춘섭(김원해) 등 감초 연기자들이 뒤를 받친다. 사정과 여월의 얼렁뚱땅 로맨스가 재미를 잃을 무렵 철봉이 원맨쇼를 펼치고 스님과 춘섭이 장단을 맞춘다. 웃음이 이어지는 이유다. ‘서부전선’에도 웃음을 보조해줄 연기자들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성화 김원해(‘해적’에도 출연했다)가 등장하나 그들이 짊어진 에피소드는 짧다. 북한군 탱크를 찾는 국군 수색대, 어설픈 중국군들이 살짝 웃음을 담당하나 남복과 영광을 뒷받침해주기엔 미약하다.
▦아직 희극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역사
‘서부전선’엔 뚱딴지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구부러진 탱크 포신으로 미군 전투기 꼬리 부분을 사정 없이 때리는 모습은 B급 정서를 바탕으로 한 장면이나 ‘웬 무리수’라는 반응도 나온다. 남복이 탄 소달구지가 전력을 다해 달려 전투기와 탱크를 따라잡는 장면에선 헛웃음이 나온다. 예능으로 이야기하는데 왜 다큐로 해석하냐고 제작진은 항변할 수 있으나 밝게 웃으며 흔쾌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장면은 맞다.
‘해적’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사정 일행이 나룻배를 타고 고래잡기에 나섰다 ‘고작’ 상어에 혼쭐나는 모습이 있다. 작살이 등에 꽂힌 상어가 사람이 그득한 나룻배를 이끌고 빠르게 도망치는 장면은 상식과는 무관하다. 영국 런던의 원형 관람차 런던아이처럼 생긴 거대한 물레방아가 붕괴되며 사정과 여월의 목숨을 위협하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어이 없는 우스개이지만 영화에서나 가능한 판타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관객들은 기꺼이까지는 아니어도 큰 반발 없이 이들 장면을 즐긴다. ‘해적’은 어차피 웃자고 만든 웃기는 영화이니까.
엇비슷한 B급 유머인데도 관객들이 ‘서부전선’과 ‘해적’을 달리 받아들이는 이유는 뭘까. 가까운 시기 벌어진 역사가 지닌 비극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혼란스러운 조선 초기는 우리의 현실과 거리가 한참 멀다. 판타지가 발생할 만한 시공간으로 관객은 받아들인다. 6ㆍ25전쟁은 어떨까. 아직 피비린내가 풍기는 아픈 과거다.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고 전쟁의 후유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전쟁과 분단이 만들어내는 비극은 B급 유머를 허락하지 않는다. ‘서부전선’이 희극에서 비극으로 치닫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유머 어린 연출을 관객이 웃음으로 반응할 수 없는 영화라면 흥행 성적표가 그리 좋을 리는 없다.
▦코미디 전문 감독이 없었다?
천 대표(또는 천 감독)는 재주꾼이다. 영화 ‘7급 공무원’(2009)와 ‘500만불의 사나이’(2012)의 시나리오를 썼고 인기 드라마 ‘추노’의 극본도 담당했다. 유머 어린 글에 일가견이 있다. 감독으로서 재능을 꽃피울 가능성도 엿보인다. 하지만 처음 메가폰을 잡은 ‘서부전선’에선 초보 감독으로서의 한계도 드러낸다.
반면 ‘해적’의 이석훈 감독은 코미디영화로 이력을 쌓았다. 장편 데뷔영화 ‘방과 후 옥상’(2006)으로 시작해 ‘두 얼굴의 여친’(2007) ‘댄싱퀴’(2012)을 거치며 대중이 좋아할 코미디가 무엇인지 탐색해왔다. ‘해적’은 이 감독의 오랜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낸 ‘잭팟’이다. 충무로의 여러 감독들은 “코미디 연출이 가장 어렵다”고 말하곤 한다. 오랜 영화계 생활에도 불구하고 연출 초보는 초보다. 희극과 비극을 떠안은 ‘서부전선’을 유려한 연출로 표현해주기는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더군다나 뜬금 없는 B급 성향 장면까지 감당해야 했으니.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