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 후 집에 갈 택시를 잡는데 샛노란 택시가 와서 섰다. 은색이나 흰색, ‘꽃담황토색’ 등으로 칠해진 일반 택시와 다른, 귀여운 병아리색 택시의 이름은 ‘쿱 택시(coop taxi)’. 지난 7월 초 택시기사들이 조합원으로 출자해 협동조합 택시회사를 출범시켰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실제로 타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평소 택시를 타면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목적지까지 갈 수 있기를 바라지만 이날은 내가 먼저 기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기자라고는 밝히지 않고 “협동조합 택시 처음 타 봤다”며 벌이가 전보다 나아졌는지 여쭤봤다.
5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기사는 “영업택시 할 때보다 월 60만원 정도는 더 버는 것 같다”면서 “벌이도 벌이지만 영업용 택시를 하면서 가졌던 불만이 없어져서 좋다”고 말했다. 영업용 택시는 사납금 외에도 다양한 명목으로 회사가 가져가는 몫이 많아 기사들이 열심히 일할 의욕도 꺾인다는 것이다. 반면 쿱택시는 기사들이 직접 운영하는 회사라 비리나 부정이 없도록 감독할 수 있어서 좋다고 덧붙였다.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는 계속됐다. “이게 끝이 아니다. 우리가 주인이니까 사업을 해서 배당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 회원이 160여명인데 200명이 넘으면 가스 충전소를 운영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 차 가스도 채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충전소 사업을 해서 얻는 수익을 배당 받을 수 있다.”
집에 도착할 즈음엔 이렇게 말했다. “요새 내겐 꿈이 생겼다. 꿈이 있어서 신이 난다.”
장기 불황으로 사회 전체가 활력을 잃고 집단 우울에 빠져 있는 이때, 순수한 희망으로 환하게 빛나는 눈빛을 본 게 얼마 만인가. 요샛말로 ‘심쿵’하는 걸 느꼈다.
출범한 지 겨우 두 달 된 쿱택시가 앞으로 잘 성장할지 예상하기는 이르다. 하지만 “내게 꿈이 있다”는 말, 그리고 환한 웃음은 쿱택시 조합원들이 작지만 큰 성취를 이미 이뤄내기 시작했다는 징표로 보였다.
요즘 곳곳에 ‘헬조선’에 대한 분노가 넘쳐 난다. 청년 실업이든 소득 불평등이든 주거 문제든 개인이 열심히 ‘노오력’해서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는 것, 이제 임계점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게 됐다는 증거일 것이다.
스타트업 기업을 창업하려고 해도 각종 인증제도와 법 규제 등 기득권자들의 진입 장벽과 지대 수취 장치가 도사리고 있고, 높은 월세에 시달리는 대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건설계획은 주변 임대사업자들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된다. 현실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면 열정이 부족하다, 눈을 낮추라고 하거나 ‘고연차 노동자 vs 청년일자리’ 식으로 싸움을 붙인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위로는 그나마 낫다. “내가 너희들만할 때는 아무것 없이도 열심히 돈 모아 결혼도 하고 집도 샀어, 징징대지 마”라고 호통치는 사람까지 나타난다. ‘헬조선’ 소리가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다.
하지만 현실을 저주하는 데서 그치면 현재 상태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강고하게 버티고 있는 기득권 위주의 사회를 누구나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사회로 바꿔내는 방법은 비 기득권자들이 자발적 연대를 통해 파괴적 혁신을 이뤄내는 것밖에 없다. 기사들이 주인이 되는 쿱택시나 대형 아파트에 8명의 대학생들이 월세 20만원씩 내고 모여 사는 새로운 주거실험(기사보기)이 한 예다.
작은 연대의 힘이 모여 기존 질서를 흔들 정도의 에너지로 승화하려면 기득권 수호 역할을 하고 있는 법과 제도에도 균열을 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입법기관에서부터 완전히 새로운 정당이 나타나야 한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으로 매일 당원들이 생활 속 문제를 얘기하고 법안을 제안하고 논의하고 투표하는 당은 어떤가? 당대표 및 당직자는 30대 이하여야만 하는 당은? 하지만 이런 당이 국회에 진입하려면 국회법 선거법부터 달라져야 한다. 에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힘든데 정치가, 연대가, 뭐가 중요하냐고? 기득권에게는 세인들의 정치 무관심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보다 흐뭇한 모습이 없다.
최진주 디지털뉴스부 기자 parisc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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