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처럼 근대 서양문물의 흔적이 많은 스포츠도 드물다. 국내에서는 구한말 왕실이 순종의 건강유지를 위해 ‘옥돌대’를 설치한 것이 최초라지만 민간에의 보급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이뤄졌다. 일본을 거쳐 들어온 서양문물이 대개 그렇듯 ‘공을 친다’는 뜻의 ‘당구(撞球)’는 근대 일본이 만들어 퍼뜨린 말이다. 막대기 등의 도구로 공을 치는 경기가 한둘이 아니지만, 너무 일반적인 ‘타(打)’나 거친 느낌의 ‘격(擊)’에 비해 어감과 음감 모두 자잘한 ‘당(撞)’은 적절한 선택이다.
▦ 당구장에는 아직 일본어가 흔하다. ‘히키(끌기)’‘오시(밀기)’‘나메(핥기ㆍ얇게 치기’‘히네리(비틀기ㆍ회전)’‘갸쿠히네리(역회전)’‘가라쿠(빈 쿠션치기)’등의 기법은 물론이고 ‘겐세이(견제)’처럼 전술을 가리키는 말까지 흔히 들을 수 있다. 청소년의 당구장 출입이 늘고,‘용어 순화 캠페인’이 활발해져 우리말이나 영어 표현으로 많이 바뀌었는데도 그렇다. 당구를 본격적으로 즐기기 시작한 게 1970년대 경제성장의 과실(果實)을 누린 베이비붐 세대이고, 최근의 당구 열기도 이들이 주역이기 때문이다.
▦ 실제로 친구들과의 당구 모임이 부쩍 늘었다. 골프를 하지 않아 20년 가까이 주말 모임에서 소외된 터라 우선 반갑다. 으레 2, 3차로 ‘달리던’ 술자리를 1차로 끝내고 당구장에 가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건강을 위해서나 권할 만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시간 당 1만2,000원으로 여럿이 즐길 수 있고, 근육과 관절이 약해 골프나 등산이 부담스러운 사람도 얼마든지 함께할 수 있다. 화투나 카드놀이 빼고 친구들과 웃고 떠들기에 이만한 것이 없다.
▦ 중년 중심의 당구 열기는 우중충하던 당구장 모습까지 바꾸었다. 과거 동네 건달들의 아지트처럼 여겨지던 것과는 딴판이다. 당구 꿈나무들을 위한 전문클럽이 각지에 들어서고, 일부 대학은 특기생도 뽑는다. 3쿠션을 비롯한 각종 당구 경기가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이 되고, 월드컵대회 등에서 국내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낸 결과다. 전국의 3만 당구장에 장비와 소모품 등을 공급하는 관련산업도 활기차다. 중소기업 중심의 일손이 많이 가는 산업이고, 자영업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앞으로 무리한 금연정책 대신 금ㆍ흡연 시설 분리 등 현명한 대안을 찾아야 할 이유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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