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병기’란 말을 안 썼으면 좋겠다. 병기는 단어 바로 옆에 괄호를 넣어서 뜻을 붙여 쓴다는 것인데, 당초 정책의 취지는 학생들이 한자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2015 개정 교육과정’ 고시를 하루 앞둔 2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진행된 언론 브리핑에서 김재춘 교육부 차관은 이 같이 말했습니다. “한자 병기는 완전히 재검토 하는 것인가?”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한자 병기’라는 표현이 익숙했고 평소 교육부 관계자들도 사용하던 터라, 정색하고 내 뱉은 김 차관의 발언이 다소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교육부는 초등학생들의 어휘력 신장 및 교과에 대한 개념이해를 높인다는 취지로 이번 교육과정에 ‘한자교육활성화 방안’을 담겠다는 계획을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그래서 찾아봤습니다. 정부가 그간 ‘한자 병기’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었던 건지, 그리고 정책을 비판했던 시민단체와 학부모, 언론들만 이 용어를 사용했던 것인지 말입니다. 우선 이날 배포된 교육부 보도자료를 살펴봤습니다.
“초등학교 한자교육은 관련 교과(군)과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활용하여 체계적인 지도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되, 적정 한자 수 및 표기방법 등 구체적인 방안은 정책연구를 통해 2016년 말까지 대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실제 ‘병기’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표기방법이 결정된 바 없고 다양한 가능성을 두고 검토하겠다는 취지인 만큼, 적어도 브리핑이 진행된 그 시점에서만큼은 김 차관의 항변이 설득력을 얻는 듯 보였습니다. ‘당초 정부 취지와 다르게 국민들이 오해할 수 있으니 조심해 달라’라는 취지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정확히 한달 전, 8월 24일 한국교원대에서 교육부 주최로 열린 ‘한자교육 활성화 공청회’ 자료를 살펴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주제발표자로 나선 김경자 국가교육과정개정연구위원장의 발표문은 ‘한자교육 활성화와 초등학교 교과서 한자병기에 관한 논의’라는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발표문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한자 병기 논제’라는 소제목 하에 4가지 방식이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1)한자어 옆에 괄호를 치고 그 안에 한자를 병기하는 방식
2)교과서 날개나 각주에 한자어의 한자를 제시하고 그 의미를 드러내는 방식
3)단원 말미에 주요 학습 개념을 제시하면서 그 개념이 어던 한자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설명하는 방식
4)한자가 한글과 달리 표의(表意) 문자임을 드러낼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림과 한자를 제시하는 방식
다시 말해, 한자 ‘병기’의 의미를 ‘단어 바로 옆에 괄호를 넣어서 뜻을 붙여 쓴다’는 의미로 국한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교육단체와 학부모 등 반대 입장에 선 이들도 역시 병기의 뜻을 포괄적으로 사용해 왔고요. 한자가 어떤 식으로든 교과서에 포함되면 평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아이들의 학습부담과 사교육 과열 등이 우려된다는 주장입니다.
정부가 ‘한자 교육 활성화’를 처음 언급했던 지난해 9월 ‘문ㆍ이과 통합형 교육과정 총론 주요사항’자료에서도 이 단어는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한자 교육 활성화를 위해 초ㆍ중ㆍ고 학급별로 적정한 한자수를 제시하고 교과서에 한자 병기의 확대를 검토한다’고 적시돼 있는 겁니다. 당시 교육부는 ‘어느 범위까지 병기라고 본다’고 밝힌 바 없었고 이후 촉발된 각계의 반대 목소리에 “아직 결정된 바 없다”고 언급한 게 전부였습니다.
때문에 정부가 당초 ‘단어 바로 옆에 괄호를 넣어서 뜻을 붙여 쓴다’는 좁은 의미의 한자 병기를 추진하다, 여론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넓은 의미로 확장하면서 수위를 조절하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지적이 가볍게 들리지 않습니다. 사실 올 초만해도 정부는 이번 교육과정개편과 함께 병기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새로운 정책을 내놓을 때 국민여론의 추이를 보며 추진여부를 결정하는 건 자연스러운 과정일 겁니다. 어떤 정부도 다수가 반대하는 제도를 무리하게 추진해 역풍을 맞는 걸 원치는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적어도 자신들이 공식적으로 밝혔던 사실마저 부인하는 건 주무부처로서 다소 아쉬운 대목입니다. 만약 김 차관이 “나는 ‘병기’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국민의 이해를 구하긴 힘들 겁니다. 브리핑 도중 차관의 발언은 자연인으로 내뱉은 말로 이해될 수 없을 테니까요.
이번 ‘2015 개정 교육과정’은 유난히 반대 목소리가 큽니다.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지적부터, 잘못된 역사 인식을 가르칠 수 있다, 정부의 취지와 달리 학생들의 학습부담이 늘 것이란 우려까지 말입니다. 추진 ‘과정’부터 그 ‘내용’, 그리고 ‘효과’까지 어느 것 하나 순조롭지 않습니다.
정부는 ‘한자 병기’ 논란에 대해 내년 말까지 대안을 마련한다고 합니다. 일각에선 사실상 좁은 의미의 병기는 폐기될 거란 전망도 하는데요. 매듭이 어떻게 지어지건 정책 추진 과정에서 이번처럼 사실을 왜곡하는 일은 반복되지 않길 바랍니다. 불필요한 논란은 학생과 학부모 정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앞으로 교육부가 ‘한자교육 활성화’에 대한 보도자료를 낼 때 ‘병기’라는 용어를 쓰게 될지, 쓴다면 어떤 의미로 쓸지 지켜볼 일입니다.
김현수기자 ddacku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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