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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위반 지학순 주교 석방운동 계기… 정의구현사제단의 탄생

입력
2015.09.2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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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월 8일 유신 정권은 긴급조치 1호를 발표한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제1항)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제6항)는 내용이었다. 그 해 9월 23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됐다.

긴급조치가 보위한 헌법이 유신헌법 즉 72년 10월 계엄 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종신 집권을 위해 제정된 헌법이었다. 긴급조치에 반발해 74년 3월 한신대 학생회를 시작으로 대학가 반독재 구국성명이 잇달았다. ‘민중ㆍ민족ㆍ민주선언’이란 제목의 전단지가 대학가에 뿌려진 건 4월 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명의의 그 전단지는 “유신반대 투쟁에 모든 학우와 전 시민이 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그날 밤 10시 임시국무회의는 ‘긴급조치 4호’를 의결한다. “민청학련과 그에 관련한 제 단체의 조직에 가입하거나 그 활동을 찬동, 고무 또는 동조하거나 표현물을 출판 제작 소지 배포 판매하는 것을 일제히 금지”하며 “이 조치를 위반한 자,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되어 비상군법회의에서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한다는 거였다. 여정남 등 8명의 사형이 집행됐고, 유인태 김지하 등 6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황인성 등 7명은 무기징역이었다.

규탄ㆍ석방운동이 국내외에서 이어졌다. 천주교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연행된 건 7월 6일이었다. 그는 닷새간 중앙정보부 조사를 받고 풀려난 뒤 7월 23일 ‘양심 선언’을 발표한다(사진).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0월 17일에 민주 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 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는 당일 명동미사 직후 구속됐다.

“공정한 재판을 바란다”는 주교단의 성명과 미적지근한 대응에 반발한 신현봉 신부 등이 시국기도회 등을 통해 지학순 주교 석방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나갔고, 그렇게 모인 사제 300여 명이 원주교구에 모여 ‘사제단’을 결성한 거였다.

‘사제단’은 권력의 부당한 행사와 부정ㆍ비리에 맞서 인권과 평화와 민주주의를 옹호해왔다. 그들의 자리는 대개 ‘정의 구현’을 위한 투쟁 대열의 맨 앞이거나 끝이었고, 민주화에 헌신한 이들의 마지막 피난처였다. 물론 교황이 무류(無謬)의 존재가 아니듯, 사제단의 활동이 무결했다고 말하긴 힘들다. 일부 사제의 공개 발언이 감정에 치우쳐 논란이 된 적도 있고, 불확실한 근거에 기반한 과도한 정의감이 음모론적 의혹을 증폭시킨 적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없었어도 한국 사회가 지금만은 했으리라 말할 수도 없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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