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후에 내가 햄버거 가게를 열어 방송인들과 파티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지난 18일 서울 용산구에 자리잡은 한 햄버거 가게에 낯익은 얼굴들이 모였다. 이계진 유정현 이기상 조영구 이무영 등 SBS ‘한밤의 TV연예’(이하 한밤) 하면 떠오르는 친숙한 방송인들이다. 이들은 햄버거를 하나씩 입에 물고 번갈아 마이크를 잡은 누군가의 말을 경청했다. 위 소감을 밝힌 이는 햄버거 가게의 주인이자 20년 전 ‘한밤의 TV연예’를 출범시킨 주인공 이충용 전 SBS 예능PD다.
그는 7년 간 ‘한밤’의 연출을 맡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주인공이다. 연예 정보 프로그램으로서 생방송 체제를 도입한 건 그야말로 센세이션이었다. 방송인 이계진과 배우 심혜진을 초대 MC로 섭외해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고, 아나운서 유정현을 지금의 전현무처럼 예능 MC로 입성시켰으며, 이소라 이승연 김정은 하지원 등 톱스타들을 차례로 MC자리에 앉히며 연예 정보 프로그램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었다. 90년대 30~40%의 경이로운 시청률을 찍으며 광고를 완판시켰다. 외환위기(IMF)로 흉흉했던 때도 ‘한밤’만은 딴 세상이었다. 이 전 PD가 드물게 7년이나 장기 집권한 이유일 것이다.
지금이야 지상파 방송 3사의 연예 정보 프로그램들이 뻔한 연예인 CF 촬영 현장, 영화 홍보 등을 담는 데 그치고, 시청률도 5~6%대에 머물러 있지만 당시의 ‘한밤’은 달랐다. 고정패널이었던 영화감독 이무영의 입을 통해 거대 음반사나 기획사 등의 갑질을 꼬집는 신선한 기획은 발군이었다. 이날 한 방송인은 “이 전 PD는 당시 SBS 프로그램과 관련한 논란도 방송해 사내에선 욕도 먹었다”고 귀띔했다. 자사 프로그램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할 소리는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방송사에 한 획을 그었던 이 PD는 2년 전 SBS에서 명예퇴직한 뒤 이태원에 햄버거 가게를 차렸다. 하지만 방송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식을 줄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이날 파티에 참석한 현재 연출자인 강범석 PD에게 “일베 사진은 아쉽더라. 코너 하나라도 제대로 만들어야 하는데…”라며 쓴소리를 잊지 않았다. 최근 ‘한밤’에서 내보낸 영화 ‘암살’의 포스터가 극우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저장소가 만든 노무현 전 대통령 이미지를 넣은 것이어서 물의를 일으킨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방송은 항상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고 웃는 그의 말은 따끔한 만큼 애정을 느끼게 했다.
어쩐지 그의 충고가 그저 한 후배에 대한 조언처럼 들리지 않았다. 현재 지상파 방송이 새겨들어야 할 숙제처럼 보였다.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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