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에서 ‘정감록 피난’ 1세대를 만나긴 쉽지 않았습니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풍기 읍내의 인견업체들을 방문하던 중 우연히도 1세대 분을 뵐 수 있었습니다. 풍기인견을 처음 일군 세대 중 유일하게 계신 대광직물의 윤정대(92) 어르신입니다.
아흔이 넘은 연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어르신은 정정하셨습니다. 특별히 아픈 데 없다는 어르신은 지금도 돋보기 없이 신문을 읽고 보청기도 끼지 않았습니다. 대구나 안동에 약속이 있으면 손수 운전해 찾아가신다고 하네요.
황해도 장현이 고향인 어르신은 일제 말 친구를 통해 ‘정감록’을 알게 됐고 해방 후 단신으로 월남해 풍기에 정착했답니다. 1947년 38선이 완전히 닫히기 전 남으로 내려가라며 아버지가 소를 팔아 배편을 마련해줬고, 장산곶에서 야음을 틈타 몰래 배를 타고 옹진으로 넘어가 개성, 대구를 거쳐 마침내 풍기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쌀 한말을 얻으려 생전 처음 지게를 지고 산에 올랐다 호되게 혼도 났고, 전쟁이 터지자 경남 밀양까지 피난을 가선 갖은 생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수복 후에 미8군 군속으로 죽령도로 확장 등 여러 일을 경험한 어르신은 풍기 금계리의 집에 베틀 1대를 들여놓고 인견사업을 시작했습니다. 2,000개가 넘는 업소들이 제살 깎아먹기 경쟁을 하던 시절, 은행에서 차관자금을 빌려 광폭의 직조기를 들여오는 모험을 걸어 본격 사업을 키워나갔습니다.
어르신의 선명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긴장감이 넘쳐 저절로 몰입이 되더군요. 영화 ‘국제시장’ 을 감상한 듯한 짠한 감동도 일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우리 부모님의 옛이야기에 그토록 재미나게 귀 기울여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르신 보다 10여 년 늦지만 일제와 전쟁 등의 기억을 지닌 비슷한 시대를 경험하신 분들인데 말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직업임에도 정작 부모님의 기억을 제대로 공유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들더군요.
그럼 왜 부모님은 옛이야기를 많이 해주지 않은 걸까요. 모두가 그렇게 고생하고 살았는데 뭐 그리 특별한 얘기겠냐 여겼을 수도 있고요, 힘들게 산 게 뭐 좋은 거냐며 굳이 전하려 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식놈이 좀체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빠의 이야기가 세상에서 가장 지루하다고 여기는,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딸아이를 보면서 얻은 깨달음입니다.
올 추석 땐 차분히 마주앉아 부모님의 옛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해보렵니다. 난세와 격동의 시기 자손의 보전을 위해 헤매었던, 나름의 정감록을 좇아 떠났던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요.
김소월의 시구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옛 이야기 들어라/나는 어쩌면 생겨나와/이 이야기 듣는가’처럼 말입니다.
이성원기자 sung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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