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힘든 것이 배고픔이었어. 해방은 됐지만 돈이 없으니 집에 갈 수 없었어. 돈은 하나도 못 받고 주먹밥 2개 받았는데 그걸로 몇 끼를 먹었는지 모르겠어.”
이자순(83) 할머니는 22일 인천 부평아트하우스에서 진행된 ‘광복 70년, 바로 잡아야 하는 역사-조선 여자 근로 정신대 피해자에게 듣는다’에서 징용 당해서 맞은 해방 당시를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증언했다.
이 할머니는 13살 때 “일본에서 공부하며 일하고 꽃꽂이까지 배울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부산행 배에 올랐다. 당시 군산에서 50명, 전북에서 200명이 떠났다. 일제가 태평양전쟁 말기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근로정신대를 대대적으로 모집하던 1945년 2월이었다. “당시 너무나 화려한 (홍보영화 속)정신대 사람들을 보고 13, 14살 먹은 학생들이 다 넘어갔다. 아버지가 뒤늦게 알고 못 보낸다고 했지만 일본인 교장이 되돌릴 수 없다고 하더라.”
이 할머니는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꼬박 5일이 걸렸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일본 도야마시의 후지코시 군수공장이었다. 눈이 처마 밑까지 쌓인 겨울 이 할머니를 비롯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한달 간의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고 군수공장에 배치됐다. “우리가 가는 곳이 도야마시라는 것도, 군수공장이라는 것도 몰랐다. 나같이 (몸집이)작은 사람은 베어링을 닦는 일을 했고 큰 사람은 선반 기계를 돌렸는데 아침 7시에 출근해 저녁 8시 넘어서까지 일했다.”
이 할머니는 배고픔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다. “아침에 1공기가 안 되는 밥과 단무지, 된장국을 먹고 부족하니 점심에 먹을 삼각형 빵 3개까지 먹고 나면 점심에는 먹을 게 없어 우두커니 앉아있곤 했다. 배가 고파 기숙사를 몰래 탈출해 일본사람에게 옷가지를 주고 콩을 얻어다 볶아 먹기도 했다.”
해방이 됐지만 이 할머니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군수공장에서 몇 달을 일했지만 월급을 한 푼 못 받았기 때문이다. 이 할머니는 해방 후 두 달이 지나서야 오사카, 시모노세키를 거쳐 부산에 닿았다.
이 할머니는 수년 전까지 근로정신대 피해자라는 사실을 친구는 물론 아들에게도 숨겨왔지만 이제는 근로정신대 피해 사실을 알리는데 적극 나서고 있다. 이 할머니는 인천에서 유일하게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단에도 참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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