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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차별 대우에…영·미군 포로 사망률 3~5% 소련군 포로는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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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차별 대우에…영·미군 포로 사망률 3~5% 소련군 포로는 57%

입력
2015.09.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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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군 포로 330만명 숨져

후퇴 허락 않은 스탈린 고집에 한번에 수만·수십만 명씩 잡혀

노천 수용소서 굶주림·질병으로 사망

슬라브린 경멸 인종주의도 한몫… 스탈린 아들도 붙잡혀 비극적 최후

● 일본군에 잡힌 포로 사망률은 27%

日 옥쇄 문화에서 항복은 수치… 적국 포로 멸시하며 가혹하게 다뤄

최고 지휘관 웨인라이트 장군조차 해방 당시 뼈와 살가죽만 남아 충격

1941년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심문을 기다리는 스탈린의 맏아들 야콥.
1941년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심문을 기다리는 스탈린의 맏아들 야콥.
1943년 초여름에 모스크바 거리를 걸어 전쟁포로수용소로 가는 5만2,000명의 독일군 포로들. 소련은 독일군 불패 신화를 깨고 자국민의 사기을 드높이려 독일군 포로를 모스크바 시내를 가로질러 이송했다
1943년 초여름에 모스크바 거리를 걸어 전쟁포로수용소로 가는 5만2,000명의 독일군 포로들. 소련은 독일군 불패 신화를 깨고 자국민의 사기을 드높이려 독일군 포로를 모스크바 시내를 가로질러 이송했다

한때 제2차 세계대전 전쟁포로를 다룬 영화가 유행했는데 ‘대탈주’ ‘제17 포로수용소’ ‘콰이강의 다리’가 그 대표작이다. “탈출은 포로의 의무”라는 명대사로 유명한 ‘대탈주’는 할리우드의 뭇 별이 빠짐없이 나와 미군 포로의 탈출을 낭만적으로 묘사했고, ‘제17 포로수용소’는 더더욱 그렇다. 밀림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된 영국군 포로의 참상을 다룬 ‘콰이강의 다리’도 포로가 위엄을 지키겠다며 적군의 교량 건설에 나선다는 식의 줄거리로 낭만성을 띠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전쟁포로의 실상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적에게 사로잡힌 미국군의 수는 13만명, 영국군의 수는 20만명이었다. 1929년에 발효된 ‘전쟁포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은 포로의 인도적 처우를 규정했다. 독일군에게 잡힌 영미군 포로의 사망률은 3.5~5.1%였다. 크게 보아서, 독일은 영미군 포로를 그럭저럭 괜찮게 대우한 셈이다. 영미군 특공대원을 사로잡으면 즉시 사살하라는 히틀러의 ‘코만도 명령’ 정도가 종전 뒤에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쟁점이 됐다.

일본 우익의 반발을 산 안젤리나 졸리의 최근작 ‘언브로큰’에 나타나듯, 일본의 전쟁포로 대우는 가혹했다. 동아시아에서 포로가 된 유럽인과 북미인은 14만명이었고,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싱가포르 자바 필리핀을 침공하던 1942년 초에 주로 발생했다. 이들의 사망률은 27%였다. 싸우다 졌을 때 죽지 않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일본군은 적군 포로를 경멸했고 가혹하게 다뤘다. 포로를 강제노역에 동원하는 일도 잦았다. 1942년 3월에 필리핀을 빠져나간 맥아더 장군을 대신해 미군을 지휘하다 사로잡혀 포로 생활을 한 웨인라이트 장군이 1945년 8월에 맥아더를 만났을 때, 그는 말 그대로 뼈와 살가죽이 맞붙은 앙상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장군 포로가 이랬는데, 사병 포로가 어땠을지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반면에 유럽 동부전선에서 전쟁포로에게 닥친 운명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불가침조약을 깨고 1941년 6월 22일 새벽에 소련을 기습한 독일은 모스크바 코앞에 다가설 때까지 승리를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나온 전쟁포로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후퇴를 허락하지 않는 스탈린의 고집에 따라 소련의 붉은군대는 진지를 사수하다가 퇴로가 끊겨 한 번에 수만명, 때로는 수십만명 단위로 사로잡혔다. 1941년 7월 첫 주에만 뱌위스톡과 민스크에서 소련군 32만명이 생포되었다. 1941년 12월 모스크바 공방전 무렵에는 소련군 포로가 320만명에 이르렀다. 이들 가운데 1942년 2월까지 무려 2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참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쟁 동안 목숨을 잃은 소련 군인이 1,000만명인데, 포로수용소에서 시달리고 굶주리고 병들어 죽은 이가 300만명이 넘으니 전쟁 중 사망한 소련군의 3분의 1이 포로 상태에서 죽은 셈이다. 전투 도중에 적의 개인화기에 목숨을 잃은 소련군인이 200만명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소련군 전쟁포로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전쟁 기간을 통틀어 적에게 사로잡힌 소련군의 수가 570만명인데, 이 가운데 330만명이 죽었으니 사망률이 57%이다. 일본군에게 사로잡힌 포로의 사망률 27%의 곱절이고, 독일군에게 사로잡힌 영미군 포로의 사망률 3.5~5.1%와는 비교하기가 미안한 통계수치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소련군 포로의 사망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까닭으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우선 전쟁 초기에 소련군이 워낙 많이 사로잡히는 바람에 독일군이 어찌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전투를 하기에도 바쁜 독일군으로서는 수천, 수만, 수십만 단위로 잡혀오는 붉은 군대 병사를 제대로 된 수용 시설에 넣고 관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허허벌판에 철조망만 대충 치고 포로를 수용하기가 일쑤였고, 그들은 건물은 고사하고 비바람을 피할 천막조차 없는 노천 수용소에서 굶주리고 갖가지 병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나치의 인종주의 이념이었다. 슬라브인을 유대인 못지않은 하등인간으로 분류해 박멸과 노예화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데올로기를 주입 받은 독일군은 소련군 포로를 다룰 때 영미군 포로와 달리 최소한의 인도적 대우를 고려하지 않았다. 소련군 포로 40만명은 독일 등지로 끌려가 각종 노역에 투입되었다. 유대인 대량학살을 위한 가스 실험의 첫 희생자가 된 가엾은 이들도 소련군 포로였다.

사로잡히면 어차피 죽으니 싸우다 죽겠다는 마음을 품은 소련군도 많았지만, 독일군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전쟁 초반만 해도 패전을 몰랐던 독일군인지라, 스탈린그라드 전투까지만 해도 독일군 포로는 10만명을 밑돌았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분수령인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뒤부터는 독일군 포로가 급증했고, 독일군이 수세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계기였던 1943년 여름의 쿠르스크 전투 이후로는 폭증했다. 1944년에 소련의 전쟁포로 수용소가 52개에서 156개로 정확히 세 배 늘어났다.

추축국 포로의 운명도 소련군 포로 못지 않았다. 독일군 포로 300만명 가운데 3분의 1이 죽었고, 소련군에게 잡힌 독일 동맹국 군인 포로 200만명도 비슷한 사망률을 기록했다. 1943년 2월에 스탈린그라드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하다가 생포된 독일군 포로 9만3,000명 가운데 끝까지 살아남아 독일로 돌아간 이는 6,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독일군 포로의 고난은 그치지 않았다. 소련 당국은 각종 전후 복구 사업에 독일군 포로를 대량 투입했다. 스탈린그라드 승전 기념물 건립이나 모스크바 지하철 증설에도 포로가 일손을 보탰다. 100만명이 넘었던 독일군 포로의 송환이 다 이루어진 시기는 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더 지난 1956년이었다. 이 비극은 클레멘스 포렐이라는 인물의 실화를 바탕으로 2001년에 독일에서 제작된 영화 ‘마지막 한 걸음까지’에 잘 묘사되어 있다.

동아시아 전선에서 영미군에게 사로잡힌 일본군 포로는 매우 적었다. 옥돌처럼 아름답게 부서지자며 사로잡히기를 거부하고 자결하는 소위 ‘옥쇄’ 때문인데, 이오지마(硫?島) 전투 때 일본군 수비대원 2만1,000명 가운데 죽기를 거부하고 생포된 이는 겨우 216명이었다. 오키나와를 사수하던 일본군 11만5,000명 가운데 사로잡힌 이는 7,400명이었다.

하지만 1945년 8월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의 관동군을 순식간에 격파한 소련이 사로잡은 일본 군인은 53만~85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들도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곧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시베리아로 끌려가 여러 해 억류된 채 지냈다. 그런데 소련의 선전에 넘어간 독일군 포로는 많지 않았지만, 일본군 포로의 경우에는 무려 4분의 1이 사상전향을 해서 본국에 송환된 뒤 좌익 운동에 참여했다는 연구가 있다. 이런 차이가 왜 발생했는지 더 깊이 연구해 볼만한 주제다.

전쟁포로는 아니지만 일본계 미국인이 겪은 고난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진주만 기습 뒤에 미국에서 반일 감정이 확 불타올랐다. 1942년 2월 19일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미국의 “군사지역”에서 개인을 추방할 수 있다는 취지의 집행명령에 서명했고, 미국 각지에서 12만명에 이르는 일본계 미국인이 거주지에서 쫓겨나 강제수용소에 갇혔다. 이 과정에서 재산을 잃고 빈털터리가 된 이가 많았다. 이들이 부모나 조부모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피해를 입은 것은 독일계 미국인이 같은 조치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명백한 인종차별이다. 아이젠하워와 니미츠처럼 독일계 미국인은 최고사령관까지 될 수 있었지만, 일본계 미국인은 먼지만 휘날리는 강제수용소에 갇혀 지내야 했다.

숱한 전쟁 포로들 가운데 한 포로의 비극이 특히 눈길을 끈다. 소련군 대위 야콥은 전쟁이 터지자 서먹서먹하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전선으로 갑니다”라고 알렸고, 아버지의 대답은 “음, 그러냐? 잘 가라!”였다. 그는 곧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자를 ‘조국의 배신자’로 간주하라는 ‘명령 270호’에 따라 그의 아내는 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그의 신분을 알아챈 독일은 항전을 포기하라는 선전 삐라에 서명만 하면 안락한 대우를 보장하겠다며 회유했지만, 그는 끝까지 거부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육군원수 파울루스가 항복하자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 히틀러가 밀사를 보내 파울루스와 야콥을 맞바꾸자고 제안했지만 스탈린은 “적군 원수를 아군 대위와 맞바꾸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여느 소련군 포로와 다를 바 없이 수용소에서 나날이 쇠약해지던 야콥은 같이 지내던 영국군 장교들과 사이가 나빠져 마음고생을 하던 차에 소련 특무부대가 1940년에 카틴 숲에서 2만명이 넘는 폴란드인 포로를 학살하고 암매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져 일부러 정지 명령을 무시하고 접근금지 구역으로 걸어 들어가다 경비대원의 총에 맞아 숨졌다. 야콥의 아버지는 바로 소련의 최고권력자 스탈린이었다.

류한수 상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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