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저성과 해고' 공정하려면… 직무의 범위 명확히 정해 놓아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저성과 해고' 공정하려면… 직무의 범위 명확히 정해 놓아야

입력
2015.09.21 16:45
0 0

'열심히 일한다'라고만 돼 있다면 회사가 일 안 주고 쫓아낼 수 있어

기업ㆍ소비자의 노동자 억압 문화 탓 경제수치에 비해 한국 삶의 질 낮아

가사노동자 권리 인정한 협약 결실… 15년 근무 중 가장 감동적인 순간

이상헌 ILO 정책특보가 지난 16일 서울 동교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북콘서트에 참석해 최근 출간한 자신의 책에 대해 독자들과 이야기 나누고 있다. 한겨레21 제공
이상헌 ILO 정책특보가 지난 16일 서울 동교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북콘서트에 참석해 최근 출간한 자신의 책에 대해 독자들과 이야기 나누고 있다. 한겨레21 제공

“‘저성과’ 해고가 공정하려면 먼저 직무를 정확하게 정의해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일을 주지 않고 ‘저성과’라고 내쫓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면 기간제 연장도, 임금피크제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상헌(48)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차장 정책특보는 19일 “노사정 합의 때 천명한 부당하게 해고되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정신과 일반해고가 양립할 수 있도록 신중하게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주요 20개국(G20) 실무자 회의 참석을 위해 고국을 찾은 그를 이날 서울 광화문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전세계의 노동 문제를 살피고 있지만 그가 가장 관심을 갖고 보는 것은 역시 한국의 노동 현실이다. 그는 이론을 공부한 경제학 박사로서, 또 노동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 정책을 만드는 실무자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느낀 한국의 노동 문제를 최근 에세이집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생각의힘 발행)에 풀어내기도 했다. 노동과 경제라는 두 화두를 품은 이 책의 표제 글에서 그는 “고객도 기업도 왕이 아니다”라며 “노동자를 시민으로 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학 시절부터 노동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는 그는 영국에서 유학한 후 들어간 첫 직장인 ILO에서 15년째 근무하며 노동 정책을 연구하고 있다. 2010년 채택된 ‘ILO 가사노동협약’의 초안을 만들어 세계적으로 주목 받기도 했다. 가사 노동자의 권리를 일반 노동자와 동등한 수준으로 보호하는 협약이었다. 그는 “ILO에서 일하면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 중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인터뷰 내용을 정리했다.

-노사정위원회가 노동개혁을 위한 대타협에 합의했다. 핵심 쟁점인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 조정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옳다, 그르다로 표현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합의문에 천명한 것을 어떻게 실현하느냐가 중요하다. 청년실업 문제를 많이 이야기했는데 실제로 청년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불투명해 보인다. 임금피크제의 효과는 당장 언급하기 어렵다. 가장 중요한 건 일반해고에 관한 게 아닐까 싶다.”

-‘쉬운 해고’에 대한 우려가 많다.

“전체적으로 볼 때 노동법 항목에 있는 고용관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말은 맞다. 일반해고를 공정한 해고라고 했는데 해고가 공정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일반해고가 많은 미국과 달리 우리는 직무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없다. 직무의 범위를 명확히 정해놓아야 저성과자를 밝힐 수 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개인의 직무에 대해 정확히 정의하지 않는다면 어떤 기준으로 저성과를 판단할 수 있겠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직무에 대한 규정이 ‘열심히 일한다’라고만 돼 있다면 기업이 일방적으로 정할 수도 있게 된다. 일을 주지 않고 저성과자로 쫓아낼 수도 있다. 기업이 마음대로 일반해고를 할 수 있게 된다면 기간제 근무를 3년으로 늘리는 것도 임금피크제를 실시하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정년을 한참 남긴 노동자든 저성과자로 규정해 일반해고를 하면 끝이다.

일반해고는 고용계약의 근간을 결정하는 큰 사안이기 때문에 좀 더 신중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노사정 합의 때 천명한 기본 정신, 그러니까 부당하게 해고되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과 일반해고가 양립할 수 있도록 찬찬히 따져보고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노동은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상황이 어떤가.

“수치만 보면 한국이 잘하는 면도 많다. 경제성장률도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편이고 실업 문제도 상대적으로 괜찮은 편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삶이 다른 나라의 그것에 비해 행복하고 만족스럽고 안정적인가.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수치상으로 한국보다 떨어지는 나라의 노동자가 느끼는 삶의 질이 더 나은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경제학에서 빠져 있는 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게 된다.”

-한국 노동자의 삶은 다른 나라와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다른가.

“한국 노동자는 자신의 현장에서 접하는 문제에 대해 불만을 갖는 걸 자연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주위 다른 노동자들의 항의나 불만에 대해서는 극단적이라고 할 만큼 가혹하다. ‘나의 노동’과 ‘남의 노동’의 구분이 굉장히 크다. 노동자인 ‘나’가 소비자로 변하면 또 다른 전환이 일어난다. 책에도 썼듯 우리처럼 비행기에서 승무원에게 과도한 친절을 요구하고 승객이 승무원의 잘못에 험한 소리를 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기업도 노동자를 회사에 고용된 사람으로만 생각하지 시민으로 대우한다는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소비자도 노동자를 시민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월한 위치에 있는 자신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사람으로 대한다.”

-그런 문화를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한국만의 문화일 수도 있다. 거기엔 시스템이 있는 거다. 정책이 뒷받침해주는 것도 없고. 시작은 기업이다. 연쇄효과라고 할까. 기업이 노동자에게 굽실거리도록 강요하면 소비자도 똑같이 하게 된다. 과도한 것을 요구하는 억압적인 문화가 정착되면 아무도 문제 삼지 않고 잘못된 관행이 이어지게 된다. 소비자 보호 정책은 있지만 노동자 보호 정책은 없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고민거리다. 소비자와 노동자가 서로 함께 인식하고 연대해야 한다. 한국이 예전처럼 고도성장을 하기는 힘들다. 이제 성장만으로 만족하고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성장만큼 중요한 것이 나눔과 존중이다.”

-G20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중요시 여기는 현안은 무엇인가.

“7, 8년째 이어지고 있는 경제위기에 대해 정책적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다. 올 하반기부터 좋아져서 내년 상반기부터는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말이 매년 나오는데 올해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경제 악화, 유럽 경제의 더딘 회복, 미국의 금리 인상 등 여러 문제가 엮여 있다 보니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각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리기 때문에 함께 보조를 맞추기가 무척 어렵다. 또 하나는 불평등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불평등이 심화할수록 경제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까진 모두 동의하지만 여러 국가들이 공동으로 어떤 걸 할 수 있겠냐고 물으면 모두들 조용해진다.”

-불평등에 대한 한국 정부의 인식과 대응은 어떤가.

“한국 정부도 불평등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있는 듯하다. 박근혜 대통령도 2013년쯤 불평등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발언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는 어젠다로만 남아 있을 뿐 구체적인 정책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오바마 대통령이 그 문제를 지적해서 여러 가지 방안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별로 다르지 않다.”

-ILO에는 어떻게 들어갔나.

“원래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공부를 마치려고 했다. 그런데 딸이 병에 걸려 해외에서 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래서 영국 유학을 결정했다. 가족이 함께 가다 보니 생활비가 문제였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지도교수님이 맡은 ILO 연구용역을 함께 했다. 그 인연으로 ILO에 취직했다.”

-ILO 가사노동협약은 어떻게 만들었나.

“근로기준법이 모든 근로자를 포함하는 건 아니다. 예외가 많다. 근로기준법에 편입하지 못한 마지막 근로자가 가사노동자였다. 가사노동은 고용관계도 복잡하고 규정하기가 까다롭다. 가장 억압적이고 착취가 심한 노동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숙원 사업이었다. 나 혼자 한 건 아니고 여러 사람이 함께 한 것이다.

실은 단순한 내용이다. 가사노동자에게 인권을 보장하고 쉴 시간을 보장하는 건데 이걸 만드는 데 100년 이상이 걸린 셈이다. 2년 만에 해냈는데 개인적으로 보람이 컸다. 협약을 체결할 땐 가사노동자들이 울면서 기뻐해줬다. 무척 감동적이었다. 나도 많은 걸 배웠다. 전세계를 다니며 많은 노동자를 만나 왔는데 더 많은 걸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