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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하지 않은 일들

입력
2015.09.2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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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다. 기다리는 버스는 좀체 오지 않고, 그는 상념에 빠진다. 헤어진 여자들의 기억이 하나 둘 두서없이 떠오르는데 회상은 이상하게 과천 언저리를 맴돈다. 지금 그의 인생은 별 볼 일 없는 상태다. 씁쓸하고 무력한 기억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문득, 함께 버스를 기다리다 차에 먼저 오르는 여고생들이 자신을 스쳐간 ‘그녀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들에게도 저렇게 재잘거리며 밤늦게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들이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 시간들은 어디로 갔을까. 생각은 조금 나아간다. 아니, ‘나’는 어떤 시간들을 지나서 지금 여기 밤의 정류장에 서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 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김종옥의 단편소설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들’ 이야기다.

제목에 일부 암시되어 있기도 하지만 소설 속 사내의 생각에 기대면, 우리의 현재를 규정하는 것은 ‘우리가 한 일들’이 아니라 ‘우리가 하지 않은 일들’일 수도 있다.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가 ‘한 일들’ 옆으로 ‘하지 않은 일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다른 선택의 가능성들. 우리는 대개 후회한다. 그때 왜 그러지 않았을까.

그러나 선택의 순간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은 확정할 수 없다. 그는 지금 그녀들에게 행하지 못한 무수한 사랑의 가능성들을 떠올리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을 후회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우리는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이 뭔지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것을 생각할 때, 그 무한한 일들을 떠올려볼 때, 나는 오히려 이상한 안도감을 느낀다.”

‘이상한 안도감’은 역설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다.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하지 못한 일들이 현재의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후회의 감정보다 더 큰 쓰라림을 준다. 그러나 쓰라리면 쓰라린 대로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 지나오지 않은 시간과 함께 있다는 생각은 해볼 만 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모두 온전히 우리의 시간이 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홍상수 감독의 신작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우리의 시간 안에 잠재되어 있는 다른 가능성 안으로 들어가 그 접혀 있는 자리를 펼쳐보는 영화다. 영화 속 한 영화감독의 1박 2일의 행로는 두 번 되풀이되고, 우리는 ‘지금’과 ‘그때’ 사이에서 미묘하게 반복되고 어긋나는 행동과 말을 보고 듣는다. 영화가 시작되고 한 시간쯤 뒤 우리는 화성 행궁 앞에서 서성거리는 주인공을 다시 만나고 그의 시간을 다시 따라가게 된다.

전작인 ‘북촌방향’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북촌방향’이 시간 안에 포박된 우리 존재의 안쓰러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번 영화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제목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일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번 영화의 인물은 두 번째 되풀이되는 시간의 행로 안에서 앞서 ‘하지 않은 일들’을 조금은 한다. 그것이 눈앞의 여인에 대한 사랑이나 스스로에 대한 정직함이라는 측면에서 조금 더 ‘맞는’ 행동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찾아오는 축복 같은 장면은 조금은 나아진 시간에 대한 선물인 듯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이렇게 두 파트로 나누어 반복되는 시간 안에서 드러나는 행위의 ‘맞고/ 틀림’을 생각해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흔한 실패일지도 모르겠다. 기실 ‘그때’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은 함께 있다. 그 둘은 서로를 지탱하며 연결되어 있다. 영화는 그 ‘함께’ 안에 사랑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를 두 번째 볼 때야 나는 그걸 느꼈다. 과천에서든 수원에서든 우리가 하지 않은 일들은 있다. 그게 사랑이면 좋겠다. 우리는 생각보다 조금 더 큰 존재인지도 모른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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