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들은 보편법칙을 추구한다. 뉴턴의 중력이론이 만유인력의 법칙(universal law of gravitation)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로 말미암아 아리스토텔레스가 나누었던 천상계와 지상계를 하나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보편법칙에는 예외가 없다. 지구와 달, 지구와 태양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태양과 명왕성 사이에 작용하는 힘과 똑같다. 자연의 보편법칙에 익숙한 과학자들은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인간의 법 또한 예외 없이 작동하기를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법의 보편성이란 인간계에서나 자연계에서나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법이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은 모양이다. 최근 OECD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법제도 신뢰도는 27%로 조사대상 42개국 가운데 39위를 차지했다. 지강헌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주장한지 벌써 27년이나 지났지만 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최근의 사법조치들은 한 범죄자의 외침을 오히려 뒷받침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정몽구, 이건희, 김승연 등 재벌 총수들에게는 한결같이 징역3년 집행유예 5년이라는 이른바 ‘3.5법칙’이 적용되었다. 한국사회의 천상계에만 적용되는 새로운 법칙이 존재하는 셈이다.
최근에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사위의 마약 투약 사건에 대해 법원에서 징역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한 것이 화제였다. 양형 기준에 못 미치는 선고와 검찰의 부실수사 등이 도마에 올랐다. ‘마약사위’에 대한 판결이 합당한지 아닌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지금까지 돈과 권력 앞에 무기력하기만 했던 법조계의 행태가 이런 논란의 한 원인임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법률 전문가가 아닌 나로서는 이런 상상을 해 본다. 만약 새정치민주연합의 문재인 대표의 사위가 똑같은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으면 어땠을까? 고 노무현 대통령의 사위였다면? 그리고 똑같은 선고가 내려졌을 때 언론의 분위기는 지금과 얼마나 같을까, 다를까?
요즘 인기리에 방송 중인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복면을 쓴 사람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고 방청객의 투표로 승패를 가린다. 얼굴이 드러날 경우 방청객의 선입견이 작용해 공정한 심사가 어려울 수 있다는 취지이다. 얼굴을 가려 누구인지 모르면 오로지 그 사람의 노래에만 집중하게 되고, 노래 실력으로만 평가를 내리게 된다는 얘기이다. 덕분에 아이돌 가수들의 가창력을 재발견할 수 있었고 가수가 아닌 연예인이 가왕에 뽑히기도 했다. 만약 그 마약사범이 김무성의 사위가 아니라 ‘복면사위’였다면 판결은 또 어땠을까? 어느 재벌그룹의 총수 아무개가 아니라 그냥 ‘복면총수’였다면 3.5법칙이 계속 적용되었을까?
과학자들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고실험을 즐겨 하지만, 나는 ‘복면사위’ 같은 사고실험은 다시 하고 싶지가 않다.
이종필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BK사업단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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