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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누구를 탓하겠는가

입력
2015.09.18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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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했다 꺼지는 유럽의 난민수용

유럽의 안보위협 무시할 수 없어

비난도 대책도 모두의 것이어야

지난 2일(현지시간) 터키의 해변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세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왼쪽)와 형 갈립(5)의 생전 모습. 이들 형제와 엄마 레한은 터키에서 그리스로 가기 위해 탄 소형 고무보트가 전복돼 모두 숨졌다. 연합뉴스
지난 2일(현지시간) 터키의 해변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세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왼쪽)와 형 갈립(5)의 생전 모습. 이들 형제와 엄마 레한은 터키에서 그리스로 가기 위해 탄 소형 고무보트가 전복돼 모두 숨졌다. 연합뉴스

터키 해변에서 발견된 시리아 난민 아기의 죽음은 뭘 남겼을까. 무감각해진 인류의 양심을 일깨우는 듯했다. 난민의 참혹한 실상을 외면하는 국제사회의 냉혹함에 질타와 개탄이 쇄도했다. 그때까지 빗장을 굳게 걸어 잠갔던 유럽 국가들도 제한적이나마 국경을 열기 시작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독일에 들어온 모든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이겠다”고 해 박수까지 받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리스, 헝가리 등에서 매일 수만 명씩 쏟아져 들어오는 끝없는 난민 행렬 앞에 유럽은 며칠 만에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기존 4만 명 분산 수용안만 분노한 국제여론에 밀려 합의했을 뿐 추가 12만 명 할당안은 유럽의회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난민 수용을 거부하는 저성장 회원국들에게 독일이 지원금 중단을 시사하자 동유럽이 “협박하는 거냐”며 격하게 반발하는가 하면 어이없게도 기독교도 난민만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국가까지 등장했다. 회원국들의 잇단 국경통제 조치에 국가 간 자유통행의 보장을 규정한, 유럽연합(EU) 공동체의 근간인 솅겐조약이 무너지고 있다는 자조의 목소리도 커진다. “2차대전 후 유럽에 6,000만 명의 난민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었느냐”고 초심(初心)을 호소하는 장 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의 외침이 무색하다.

유럽의 입장을 이해 못할 건 아니다. 유엔난민협약이 규정한 난민은 법적인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난민 수용국 입장에서 보면 이들을 위한 주택, 교통, 교육, 의료 등 치러야 할 사회ㆍ경제적 비용이 적지 않다. 정치적으로도 대단히 예민한 문제다. 난민 행세를 하는 불법 이주민들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다. 서유럽으로 가는 길목인 세르비아의 헝가리 국경 부근에 시리아 국적이 아닌 다른 나라 여권이 버려져 있다는 보도에 유럽인들이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오죽했으면 프란치스코 교황 조차 수니파 무장조직인 이슬람국가(IS) 대원들이 거대한 난민 행렬에 섞여 유럽에 잠입할 가능성을 경고했을까.

부끄러운 건 난민을 거부하면서 내세우는 얄팍한 논리다. 휴대폰까지 갖고 있는 사람을 난민으로 인정해야 하느냐는 논란이 그 중 하나다. 내전에 시달리는 최빈국 국민이 너도나도 휴대폰을 갖고 있는 사실이 언뜻 의아할 수 있다. 그러나 정보가 통제된 이들에게 휴대폰은 폭탄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내 가족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파키스탄 난민에게 “전쟁도 없는데 왜 난민행세를 하느냐”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불순세력에 대한 이들의 ‘정당한’ 우려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유럽을 비난한다면 해변에 얼굴을 묻고 죽은 아기를, 햄버거를 먹기 위해 죽음의 바다를 건넌 싸구려 이주민으로 몰고 가려는 프랑스 주간지의 행태처럼 불순세력에 빗대 난민 전체를 매도하려는 인종차별적 분위기부터 지적해야 한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언론에서 밝힌 대로 국경을 개방하자는 자유주의 좌파들도 위선자이고, 난민의 위협을 과대 포장하려는 반이민주의자들 역시 포퓰리스트에 불과하다.

난민은 구조적 문제다. 빈곤과 테러가 배후에 도사리고 있고, 이는 국제사회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와도 맞물려 있다.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 아프가니스탄을 헤집어 놓은 미국이 스스로 이를 되돌려 놓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근본적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다. 잠시 반짝 인도주의가 빛을 발했다가 금세 집단 이기주의로 되돌아가고 마는 인간의 본성을 탓할 것만도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난민보호 수준이 최하위인 우리 내부를 돌아보면 더욱 낯 뜨겁다. OECD 30개국의 평균 난민보호비율은 인구 1,000명 당 2명이지만 우리는 100만명 당 2명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시리아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은 단 3명이다. 쓸데 없는 감상이지만, 누가 누구를 탓하겠는가.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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