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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랍 후 은행강도 변신한 재벌家 손녀… 스톡홀름 증후군 피해자? 유전무죄 수혜자?

입력
2015.09.1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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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랍 후 두달 여만에 은행강도로 모습을 드러낸 후 패티 허스트가 LA 방송국에 배포한 자신의 사진.
피랍 후 두달 여만에 은행강도로 모습을 드러낸 후 패티 허스트가 LA 방송국에 배포한 자신의 사진.

FBI 10대 수배자 퍼트리샤(패티) 캠벨 허스트(Patricia Campbell Hearst, 1954~)가 1975년 9월 18일 체포됐다. FBI 리스트에 기재된 허스트의 직업은 ‘도시 게릴라’였다.

영화 ‘시민 케인’의 모델로 알려진 언론 재벌 윌리엄 허스트의 손녀인 그는 UC 버클리대(예술사 전공)에 다니던 74년 2월 4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극좌무장조직 SLA(Symbionese Leberation Army)에 의해 납치됐다. 강도 전과자로 감옥에서 좌파 이념을 익힌 뒤 73년 탈옥한 도널드 디프리스(Donald Defreese, 1943~1974)의 SLA는 사회와 체제에 대한 증오심으로 무장한, 소규모(조직원 12명) 도시 게릴라 집단이었다. 경쟁과 사적 소유에 반대하고, 인종주의와 성차별 노인차별 파시즘 개인주의에 맞선다는 게 표방한 이념이었다. ‘이념’을 위해 그들은 강도 짓으로 무기를 장만했고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범행 도중 조직원 두 명이 체포되자, 석방 요구의 지렛대로 유력자의 딸을 납치한 거였다.

‘동지’ 석방 협상에 가망이 없자 SLA는 허스트가(家)가 캘리포니아의 모든 빈민에게 가구당 70달러어치의 음식을 배급하면 손녀를 풀어주겠다고 밝힌다. 약 4억 달러가 드는 일이었다. 첫날 허스트가는 200만 달러 어치의 식료품을 빈민들에게 나눠줬다. 대혼란이 빚어졌고, 경찰이 저지하고 나서면서 그들의 ‘자선’은 이어지지 못했다.

허스트는 납치 두 달여 뒤인 그 해 4월 15일 칼빈 소총을 든 은행강도로 샌프란시스코 북부 하이버니아 은행 선셋지점에 나타나 미국 사회를 또 한 번 충격에 빠뜨렸다. 5월 FBI는 SLA의 아지트를 급습해 디프리스 등 6명을 사살하지만, 허스트는 현장에 없었다. 6월 7일 허스트는 자신이 SLA의 일원이며 대의를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성명을 담은 녹음 테이프와 사진(사진)을 LA 방송국에 배포하기도 했다.

체포 당시 바지에 오줌을 지릴 정도로 공포에 사로잡혔던 허스트는 얼마 뒤 변호사를 통해 “나는 강하고 자유롭다”며 형제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여유를 보였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강압에 못 이겨 동조한 범행이었다고, 테러범의 아이를 밴 것도 강간에 의한 것이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재판은 범행 동기와 그가 처했던 상황을 둘러싼 격론으로 이어졌다. 그는 35년 형을 선고 받았다가 7년 형으로 감형됐고, 투옥된 지 22개월만인 77년 1월 지미 카터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가석방됐다. 79년 결혼했고, 자서전과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의 사연은 스톡홀름 증후군의 대표적인 사례로도 인용되고, 유전무죄의 사례로도 언급된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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