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기바둑 두다 쫓겨난 일화 등 日 유학 시절 스승 교훈 전해
“10세때 일본 유학을 떠나 10년간 바둑을 배웠습니다. 그때 가장 중요하게 배운 것은 바둑을 잘 두기에 앞서서 먼저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둑계 명인 조훈현(사진) 9단이 16일 삼성그룹의 사장들 앞에 섰다. 그는 이날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열린 삼성 수요사장단 회의에 참석해 삼성 계열사 사장들을 상대로 ‘바둑 황제의 끝나지 않는 승부’라는 강연을 했다.
삼성 사장들의 마음을 흔든 것은 일본 유학 시절 스승이었던 세고에 겐사쿠(1889~1972)와 얽힌 추억이다. 1953년 목포에서 태어난 조 씨는 네 살 때 바둑돌을 잡았다. 이 때 이미 끼를 보여 이듬해 다섯 살 나이로 서울에 바둑 유학을 떠났다. 아홉 살에 프로 입단을 했고 열 살 때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때 만난 스승이 일본 기원의 창립자이자 현대 바둑의 기초를 놓은 인물로 평가받는 세고에 겐사쿠였다. 세고에는 웬만한 수준이면 아예 제자를 받지 않아 중국인 제자 우칭위안 이후 30년 동안 제자가 없었다. 한국에서 온 바둑 천재라는 소개를 들은 세고에의 첫 반응은 “난 천재를 본 적이 없다”는 냉소였다.
“세고에 스승은 대뜸 석 점을 물려줄 테니 바둑을 두자고 했습니다. 제가 이겼죠. 두 점을 물리고 내리 두 판을 더 붙었습니다. 제가 다 이겼어요. 그렇게 세 판을 연속 이기자 제자로 받아줬습니다.” 그때 이미 일흔을 바라보던 세고에는 1년에 바둑을 두세 번만 두는데, 바다 건너온 정체 모를 꼬마와 내리 세 판을 둔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기대가 큰 만큼 스승 세고에의 가르침은 혹독했다. 그가 강조한 것은 “바둑의 길을 지키고 먼저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조씨는 선배들과 내기바둑을 뒀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스승의 파문 선언 이후 한달 간 갖은 고생을 다 한 끝에 겨우 용서 받아 다시 제자로 들어갔습니다.”
조씨가 군대 문제로 한국에 다시 들어온 뒤 세고에도 한국을 찾았다. 조씨는 멀리서 오는스승을 위해 온갖 여행계획을 세워뒀다. 그런데 김포공항에 내린 세고에는 조씨를 데리고 사흘간 바둑만 뒀다. 세고에는 떠나면서 “바둑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 점검해보기 위해 왔다”며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혼내주려 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아 그냥 간다”는 말을 남겼다.
세고에는 혹독했지만 조씨를 유난히 아꼈다. 객지 생활을 하는 어린 제자를 위해 개를 선물했고 눈을 감는 순간에도 조씨를 단련시키라는 유언으로 전했다.
조씨는 명인이 된 지금도 스승의 가르침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최근 펴낸 에세이집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도 그런 뜻에서 쓴 책이다. “어느 곳에 있건 최선을 다하라는 스승의 말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꼭 하고 싶습니다.”
이날 삼성이 조씨를 강연자로 초청한 것은 엄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최정상의 선 사람이 전하는 교훈을 듣기 위해서였다. 삼성 관계자는 “인간적인 울림이 큰 강연이었다”며 “여러가지를 돌아보게 만든다”고 말했다.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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